[편집자 말] 한국에 있는 난민의 수는 약 4만 명이다. 이중 약 20% 여성이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주목되지 않는다. 지난해 난민 대 국민 또는 난민 대 여성 구도로 논쟁이 붙었을 당시에도 그랬다. 세계 여성의 날을 계기로 한국 난민여성의 여건을 살펴본다.
[이슈(1) 차례]
①새드엔딩으로 끝난 난민여성의 한국 결혼생활
②여성난민, 전쟁과 폭력에 쫓겨 대한민국에 왔지만
③한반도 평화? 전쟁지원국의 무기대장 문재인
“남편은 제가 아니라 제 돈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처음엔 방세가 밀려 있다고 해서 35만 원 씩 두 번을 내줬어요. 무역일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일이 잘못 풀려 계좌가 막혔다고 했죠. 사랑했으니까 의심하지 않았어요.”
40살이나 많았지만 에이미(가명) 씨는 그에게 애정을 느꼈다. 80세 홍혁태(가명) 씨는 한국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도 친절했다. 더구나 르완다에서 온 여성난민 에이미 씨에겐, 피붙이 하나 없는 곳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얼음장 같던 세월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지난해 1월. 그를 처음 만난 날은 유독 추웠다. 벌써 두 번째 겨울이었지만 옷 속을 파고드는 한기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날따라 많은 짐을 캐리어 두 대에 나눠 싣고 경기도 김포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는데 그 남자가 다가왔다. “웨얼 아 유 고잉?” 서투른 영어로 그가 물었다. 택시 잡는 걸 도와주던 그는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친절한 그가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마음을 나누는 데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집으로 에이미 씨를 초대했다. 그리곤 곧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에이미 씨에게 같이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안산에 있는 에이미 씨 집으로 살림을 합쳤다. 도움을 받던 피난센터에도 종종 함께 들렀다. 교회 사람들과도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그의 청혼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에이미 씨가 한국 남편과 함께 미소를 짓고 있다.
|
“돈이 마르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그는 행복해 보였다. 에이미 씨가 모든 돈을 대고 있을 때였다. 현금으로도 주고 계좌로도 송금했다. 한번은 서류 번역을 주선해줘 150만 원을 보내기도 했다. 2장짜리였지만 그를 믿었다. 음식이 떨어질 때면 10만 원어치씩 장을 봤다. 차 기름 값도 항상 에이미 씨가 냈다. 언젠가 에이미 씨는 그에게 소금을 사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조차 싫다고 했다.
혼사는 봄볕이 내리는 3월 말에 치렀다. 면사포도 하객도 없었지만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관청에 혼인신고를 했다. 함박웃음이 사진에 담겼다. 남편은 에이미 씨의 현재 난민신청자 비자를 결혼 비자로 바꾸자고 했다. 그런데 출입국관리소에 같이 간 남편은 왜인지 관리소 직원과 한참을 얘기하더니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한국말로만 하니 도통 무슨 얘긴지 알 수 없었다. 출입국 직원도 남편에게만 절차를 설명해줬다.
한집 살림이 길어질수록 에이미 씨의 지갑은 얇아져 갔다. 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돈을 부치기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믿고 의지하는 남편이니 거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민 신청자 지위로 단순노무직을 허용하는 G-1 비자로 일해 간신히 모은 돈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에이미 씨의 돈이 마르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는 에이미 씨가 형편이 어렵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급기야 가방을 싸서 며칠씩 외박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5월 어느 날 남편이 안산 출입국관리센터에서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관리소 직원과 한참을 한국말로 이야기하더니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역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이번에도 에이미 씨에겐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남편은 집에 돌아와 비자 문제를 도와줄 수 없다고 하더니 다시 집을 나갔다. 그것이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시 남편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에이미 씨는 남편이 왜 결혼을 파탄 내고 있는지, 비자를 신청해 주지 않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비자를 받으면 더 이상 돈을 주지 않을 것이어서 그렇다는 지인의 얘기가 들려왔지만 믿기 어려웠다. 그러다 페이스북에서 남편 계정을 발견했다. 에이미 씨는 그에게 만나자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자기를 만나려면 일단 100만 원을 달라고 했다. 에이미 씨는 그제야 그의 결혼이 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민 끝에 이혼 얘기를 꺼냈지만, 또 돈 얘기부터 했다.
아프리카 남성도, 한국 남성도
에이미 씨가 태어난 르완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적어도 1994년 투치족 제노사이드가 발생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 때 엄마와 아빠, 친척 모두가 몰살당했다. 혼자 살아남았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당시 10대였던 에이미 씨는 다른 가족에 얹혀 살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곧 투치족인 한 남성과 결혼을 했다. 결혼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남자는 초혼이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이미 부인과 아이를 두고 있었다. 그래도 세 아이를 낳아 키울 만큼 정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정치인이었고 의회에도 연이 닿아 있었다. 그런데 곧 투치족 제노사이드에 대한 보복 학살이 시작되면서 불화가 시작됐다. 남편이 학살에 연루돼 있었다. 교회에서 일했던 에이미 씨는 학살에 동의할 수가 없어 지역 행사나 관련 자리에 일절 나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불만 분자가 됐고 곧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남편 외에 누가 밀고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에이미 씨는 결국 2016년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 국제행사에 참석해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다시 르완다에서 가족이 몰살당했을 때처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삼성 하청기업에서 상자를 포장하고, 마니커에서 닭 가공 일을 하기도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이들과 새 삶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벌이가 괜찮을 때는 한 달에 2백만 원까지 쥘 수 있었지만, 1백만 원을 받을 때도 있었다.
결혼한 후 한국 남편이 생긴 뒤로는 비자 문제로 1년 동안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겨우 친구 집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출입국관리소에 하소연을 해봤지만 비자가 만료됐기 때문에 재신청을 하려면 먼저 벌금 2백만 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신청해도 연장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간신히 변호사를 구해 50만 원을 내고 도움을 호소했지만 그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돈도 돌려주지 않았다. 출입국관리소에 벌금 감액이 가능한지 물어봤지만 거절당했다. 가진 돈은 주변 교회 지인들이 모아준 1백만 원뿐이다. 인터뷰 끝에 에이미 씨가 울먹이며 말했다.
“당장 끼니도 해결하기 어려워요. 아이들은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있고요. 오직 바라는 것은 제 G-1 비자를 되찾는 것뿐입니다.”[워커스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