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친구들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공부할 때였다. 경찰과 군대를 묶어 ‘억압적 국가장치’로 보고 가족과 학교 등등을 묶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분류하자, 군에서 막 제대했던 한 친구가 퍼뜩 토를 달았다. “군대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의 생생한 경험담을 듣고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상투적 표현 속에 진실이 담겨 있는 경우들이 있다. ‘군대 다녀오면 사람 된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군대 경험이 없는 존재는 아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까. 그래서인지 일상에서 남성들의 군대 이야기가 무르익다보면 누가 진짜 ‘사람’인지를 가리는 게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혹한기 때 말야.” “무장공비가 침투했는데….”
이때의 ‘사람’이 단순한 생명체를 지시하는 말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는 타인이 ‘사람’일 때야 비로소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군대를 다녀옴으로써 거듭난 ‘사람’이야말로 규범화/정상화된(normalized) 존재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게다가 오늘 이야기할 정성조의 논문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 ‘사람’은 정확히도 ‘이성애자 남성’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렇게 정상인, 이성애자, 남성이 된다. 혹은 그렇게 강제된다.
통념적으로야 군대는 ‘일정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조직된 군인의 집단’을 뜻하지만, 언제나 진실은 그와 같은 사전과 상식 너머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정성조가 「한국 군대 남성성의 형성과 동성애혐오의 재/생산」에서 주목하는 ‘규율과 질서’는 이성애 규범을 강제하는 성차별적 제도이다. 그의 논문을 들여다보자. 그는 자신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군대 내 동성애 ‘문제’는 한국 사회가 군대와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분법적인 젠더 규범과 이성애 규범, 동성애 혐오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탄생’했다.
2. 군대 경험이 있는 17명의 성소수자 인터뷰 결과, 군대의 규율화는 단지 균질적인 군인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이성애자 남성’을 만들어낸다.
3. 결국, 군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성소수자 남성의 전략적인 젠더 수행은 동성애 정체성의 비가시성으로 인해 동성애 혐오의 재생산 과정의 일부가 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군대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남성성이 형성되고 동성애혐오가 생산/재생산된다. 물론 래윈 코넬(Raewyn Connell)이 논증했던 것처럼 남성 그리고 남성성이 균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를 지배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정점으로 하는 다차원적이고 보통은 위계적인 섹슈얼리티 규범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정성조의 접근이 주목받을 만한 것은 ‘군대 다녀오면 사람 된다’는 공식을 ‘군대가 사람을 만든다’로 전환시켰다는 점,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군대가 남성성을 만든다’는 또 다른 공식으로, 그것도 헤게모니적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성소수자들의 경험을 통해 입증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첫 번째 논점. 그의 역사적 접근을 따라가 보자. 그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있어왔던 군대와 동성애를 잇는 역사적 키워드들을 조망한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군대라는 제도에서 동성애가 그동안 어떻게 ‘문제화’되어 왔었는지를 되묻는다. 비록 최근에는 군대 내에서 합의된 동성간 성관계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현실의 여전한 엄혹함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는 그 기원을 식민-후기의 역사적 굴곡과 연관 짓는다. 널리 알려졌듯 대부분의 법률 체계가 (일본을 거쳐 유입되어) 독일식으로 편재된 상황에서 미군정에서 개입한 ‘계간죄’(계간은 남성간 성교를 비하하는 말이기도 하다)로 인해 미국적인 동성애 혐오 정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도 병영-사회의 상호작용은 실정적인 상관관계를 유지했다. 병영 사회에서 성을 통제할 필요성은 주민등록 체계와 가족계획 등으로 이성애 규범이 확립되는 과정과 맞물렸다. 그러면서 군대 내 반동성애 문화는 하나의 제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대표적인 것이 군형법 92조 6항(추행)).
두 번째 논점. 이러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사람들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든다. 정성조는 군대 내에서 강제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군인들의 수행적 과정과 학습을 통해 더욱 공고화된다고 본다. 우리는 언제나 공동체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정작 공동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게다가 군대와 같은 폐쇄적인 사회-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성매매 문화가 가장 첨예한 집단 중 하나가 바로 군대 아니던가. 이런 환경에서 한국의 남성들은 그들 고유의 호모-소셜, 즉 남성 연대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런 외설적 규범에서 어긋나는 감정·담론·행동에는 ‘변태 성욕’이라는 낙인을 부여한다. 성소수자 군인이 그런 공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24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집단 내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지만 동시에 끔찍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병영에서 커밍아웃한다는 것은 그 즉시 관심병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역사와 관행에 대한 검토가 이뤄지고 세 번째 논점이 제시된다. 성소수자들의 군인 경험에서 정성조는 ‘전략적 젠더 수행’이라는 맥락을 읽어낸다. 그들은 자신을 이성애자로 ‘패싱’하고 유능한 군인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가운데(“어느 정도 계속 가면을 써야 되는 거니까”), 오히려 군대 생활을 통해 스스로를 성소수자로 정체화하는 계기를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군대의 남성성에 비판의식을 가지는 독특한 실천을 내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이 불명확한 ‘전략’에 일정한 ‘딜레마’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들의 가면 쓴 연기를 통해 결과적으로 이성애적 남성성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 군대의 제도와 관행은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공모’의 결과인 셈이다. 물론 성적 지배와 동성애 혐오로부터 나오는 대한민국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저자가 강조하듯) 어디까지나 군대라는 억압적 제도 자체와 거기에 의존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서 정성조의 이론적 프레임과 서술 체계 자체는 비교적 익숙한 것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의 논문에서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명쾌한 접근과 동시에 다소 불안한 듯한 결말을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략적 실천’이라는 것의 문화정치적 함의는 가치 판단이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비교적 명확한 가해와 피해의 구도에도 불구하고, 군대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이성애자 남성만을 재생산하지 않는다는 발견에는 얼마간 주목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연구참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제는 정체성이 확립된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아무래도 부정하려 했죠. ‘그건 아닌데… 장난인 것 같은데’ 이랬죠.”
그런 점에서 군대를 퀴어링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더불어 저자를 비롯한 여러 비판적 접근들을 통해 더욱 가속화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남성성에 대한 통념이 깨지는 상황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남성성, 남자다움 따위에 어떤 자연스러움이 있다고 믿는 게 보통이다. 정성조는 그와 같은 자연스러움이 사실은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행위들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실제로는 그렇게 순조롭지만도 않다고 강조한다.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대사를 빌면 우리는 스스로 되뇔 필요가 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워커스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