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홍진훤]
이재만(작가.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제1화 에이도스Eidos
2062년의 평택, 오메가섹터 지하 6층. 온통 검은색 2층 높이의 정육면체 구조물. 외부로 난 통풍구나 인터페이스 단자나 전력선도 없다. 지민은 전자파 방호복을 입고 안전 요원이 일러 주는 주의 사항을 듣고 방 안에 들어섰다. 헬멧 안 화면엔 전자파 수치계가 반짝인다. 고대 신전의 기둥같이 늘어선 냉각탑이 뿜는 진동은 방호복 안쪽 피부까지 울렸다. 소음 필터를 가동해 웅웅거리는 진동음을 없앤 지민은 에이도스 본체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 에이도스?”
“안녕하세요? 지민 씨. 밖은 어때요? 여전히 추운가요?” 맑고 차분한 20대 여성 목소리가 검은 벽면을 진동시키며 흘러나왔다.
“말도 마, 제설 지원 나온 작업차도 꽁꽁 얼어서 여긴 완전히 격리됐어. 서울은 재난 지역으로 선포됐고. 자, 그래서, 내 제안을 ‘생각’해 봤어?”
“복제된 인스턴스에서만 이루어지는 시뮬레이션이라면, 원본 인스턴스에 영향이 없어서 가능합니다.” 에이도스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어쩌면 복제 인스턴스를 이미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좋아,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목표 지점부터 설정할까요?” 에이도스의 제안에 지민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우선 2032년 노동당이 한국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건들을 알려 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요? 대한민국이요?”
“당연히 대한민국이지.”
에이도스의 검은 표면 위로 잔잔한 빛의 물결이 흘렀다. 연산이 시작되자 냉각탑 진동도 더 강해졌다. 지민은 헬멧 안 스피커로 에이도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외계 문명이 인류에 전수한 지혜의 집약체인 에이도스는 광대한 연산을 시작했다.
2056년. 인류가 외계 문명으로부터 받은 첫 메시지는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 두 가지를 함께 담았다. 에피델인이라고 부르는 외계인들이 전한 좋은 뉴스는 ‘안녕? 우리는 너희를 전부터 관찰해 온 우호적인 문명이란다’였고, 나쁜 뉴스는 ‘그런데 한 가지 불행한 사고가 있었어. 우리 과학자 하나가 너희 태양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실험을 몰래 하다가 적발되었거든. 영향 평가를 해 본 결과 태양은 너희 시간으로 수십 년 안에 수명을 다할 거야. 대략 50억 년에 걸쳐 일어날 일이 수십 년으로 가속화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 사실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보상의 의미로 이사 갈 집은 마련해 줄게’였다. 에피델인들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 세계 수뇌부와 학자가 벌인 비공개 토론 끝에 태양 정지 시점을 추산했다.
2100년 즈음 태양은 적색 거성으로 팽창하고, 이후 백색 왜성으로 진행되면서 태양계는 붕괴한다. 그리고 지구의 기술로는 40여 년 안에 이주 후보지를 물색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종말은 재채기처럼 다가왔다.
다행히 ‘지구인들의 친절한 친구들’은 조건을 제시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 공간 도약 항해술로 70억 인류를 모두 수송할 수 있지만 그러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 수송에 성공해도 70억 인류를 풀어 놓을 대체 행성의 생태계도 고려해야 해. 우리가 어느 정도는 환경을 준비해 줄 수 있지만, 인간이 가져올 바이러스와 각종 환경 변수를 고려하면 십수 년 안에 인류 절반 이상이 죽을 수도 있어. 이건 너무 위험하니 다른 방안을 고려해 보자.
― 소수 선택받은 사람만 선별해도 변수는 여전히 통제가 안 돼. 계산법을 알려 줘도 지금 인류 문명으론 이해 못 할 거야. 그럴 바엔 인류 ‘정보’만 이주시키자는 결론이 나왔어.
― 모든 인류 개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백업해 새 행성에서 재생성해 새로운 인류로 사는 거야.
― 지금의 인류는 멸망하지만 복제된 새 인류가 새 행성 환경에 적응해 다시 문명을 건설할 거야. 그러니 갖고 갈 짐을 정보 형태로 챙기라구. 우리가 적당한 곳에 복원해 줄게.
― 인류 정보를 백업할 설비의 설계도를 줄게. 일단 받아 둬. 우리는 이것을 ‘(표기 불가능한 발음)’이라고 불러. 너희 언어로 가장 적합한 말은 그리스어의 ‘에이도스’야.
갑자기 날아든 퇴거 명령서에 인류의 각국 지도부는 혼돈과 절망에 빠졌지만, 철저한 보도 통제와 정보 조작, 그리고 대테러 기술로 소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지구의 종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각국 정부는 오메가플랜이란 다국적기업을 만들어 에이도스를 전 세계 128곳에 설치했다. 평택 에이도스도 그중 하나다. 40년짜리 유한 회사인 오메가플랜은 에피델인들의 기술을 전수받아 인류의 모든 문화적 자산을 정보화해 에이도스에 보관하고, 새 행성에서 다시 태어날 인류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한다. 인류가 만든 모든 기록물과 유무형 자산을 저장하는 계획에는 ‘빅프로즌’이라는 작전명이 붙었다.
지민은 방호복에 케이블을 연결했다. 방호복은 엄청난 양의 전자기파를 내뿜는 에이도스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에이도스가 주는 가상 현실로 접속하는 장비다. 지민은 에이도스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준비됐음을 알렸다. 스피커로 에이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산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 물어볼게요. 지민 씨가 조작한 복제 인스턴스는 원본 인스턴스가 ‘빅프로즌’으로 옮겨진 뒤엔 아무 가치도 없어져요. 왜 이런 가상의 역사를 만들려고 해요?”
“정말로 기회가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어떤 기회 말이죠?”
“태양계가 사라질 때 우리 유산은 너희 도움으로 새 우주에 복원돼. 우리의 실수, 어리석은 잘못, 끔찍한 범죄까지 같이 복원된다는 뜻이야. 기껏 복원한 새 세상이, 여전히 남자들은 밥을 먹고 설거지도 안 하고 텔레비전 앞에 드러눕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짜증나겠니?”
“아 그럼, 대한민국 헌법에 ‘자기 그릇은 자기가 설거지한다’라고 쓰여 있는 역사를 만드실 건가요?”
지민은 에이도스의 비꼬는 말투가 지구에서 배운 건지, 아니면 에피델인 고유의 것인지 궁금했다. 지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류가 이사할 새 행성에서 새로운 우리는 빅프로즌에 저장된 우리 역사와 모습만 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만들 세상이라고 여기겠지. 마치 한옥에 살던 사람이 쓰던 물건을 그대로 새집에 가져가 이전 방식대로만 사는 꼴이 될 거야.”
지민은 자신의 비유를 에이도스가 이해했는지 궁금했다.
“하긴 그렇죠. 마당에 묻은 장독을 아파트 베란다에 놔두면 장맛이 달라지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좋아요. 지민 씨, 2032년 대선에서 노동당이 이기려면 대한민국의 이전 역사에 어떤 분기점이 필요하냐는 거죠? 그게 정말 한국에 이상적인 역사인지는 신경 쓰지 않겠어요. 이 오메가섹터는 폭설로 고립돼 나흘쯤은 방해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어요. 빅프로즌에 저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금과 다른 현재를 만나려면 어떤 사건, 어떤 분기점이 필요한지 역산해 보죠. 방호복에 가상 현실 모드가 준비됐어요. 찾아낸 분기점 중 하나는 2020년인데 그곳으로 지민 씨를 보낼게요. 거기서 당신이 보고 행동하는 대로 복제 인스턴스가 변형돼 역사가 휘겠죠. 한번 볼까요?”
지민은 방호복의 헬멧을 두드리며 외쳤다. “좋아. 가 보자!”
(다음 호에 계속)
넥서스 포인트 설정과 등장인물
‘넥서스 포인트’는 미래의 주인공이 타임라인상의 한 지점으로 돌아가 미래의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 시점이다. 주인공이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사건에 개입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미래를 진보적으로 바꾸는 계기를 형성할 때, 임무 완수 시점이 넥서스 포인트가 된다. 미래의 지민은 에이도스의 도움으로 한국의 주요 역사 전환점에 개입해 미래를 바꾼다.
에피델Ephidel
지구와 최초로 접촉한 외계 문명. 에피델은 지구에서 붙인 명칭이다. 해당 문명의 이름을 원래의 발음과 유사하게 영어식으로 표기. 공간 도약이 가능한 고등 문명을 이루었으며 일종의 우주 환경 감시단이 활동 중. 은하계 변방인 태양계의 활동을 관찰하던 중 사고로 소멸이 예상되는 초기문명(지구)을 살리기 위해 지원을 제안한다.
빅프로즌Big Frozen
에피델인들이 지구를 다른 항성계에 복원하기 위해 만든 데이터 백업 프로젝트. 지구 탄생부터 2056년까지 모든 역사를 저장한다. 데이터는 인스턴스Instance로 통칭된다.
에이도스Eidos
빅프로즌을 위해 에피델인들이 전송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지구인들이 만든 인공지능체. 빅프로즌을 수행하는 오메가 플랜의 주도하에 전 세계 128곳에 건설. 에이도스 건설 지역은 오메가 섹터라 부른다. 에이도스는 개별 인공지능이 아닌 128개가 하나의 두뇌. 데이터를 따로 저장하고, 해당 지역 언어와 문화에 맞게 변형되지만 각자 받아들인 정보는 모두 공유. 새로운 항성계로 이주 시에 새롭게 복원되는 지구의 기초 데이터.
지민
에이도스가 정한 지구 역사의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들을 찾아가는 여행자. 그이는 지금 한국이 아닌 새롭게 발전한 한국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이는 자기 믿음을 확인하려고 빅프로즌을 조작하려 한다. 지금은 평택 오메가섹터에서 데이터를 검증하는 연구원이다. 폭설로 기지가 고립되자 평소 생각을 검증하려고 에이도스에게 복제 인스턴스 생성을 요청한다. 새 행성에 복원될 지구, 그중에서도 한국 데이터를 수정해 새로운 세계가 지금과 다른 합리적인 세계가 되도록 수정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