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강연을 들은 적 있어요. 청소 노동자도 모두 직영화 해줬다면서요. 우리한텐 꿈 같은 얘기지. 서울시 노동자와 시민들이 부럽죠.”
부산지하철의 한 청소노동자가 하소연했다. 어디 부산 지하철 뿐이랴. 다른 지자체와 민간 사업장 청소노동자들도 서울시 산하기관 청소노동자를 부러워한다. 정규직화, 생활임금 보장 같은 비정규직의 염원을 시장이 직접 나서서 얘기하는 경우가 어디 흔할까.
부러우면 지는 거
하지만 정정해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우선은 ‘직영화’와 ‘정규직’ 전환이라는 오해다. 서울시는 2013년부터 올해까지 청소, 시설, 경비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 5,953명을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직영 노동자로도, 정규직으로도 전환되지 못했다. 지하철 청소 노동자의 경우,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설립한 자회사와 고용 관계를 맺고 있다. ‘자회사’라고 이름만 바꾼 용역 업체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것도 아니다. 그들의 고용 형태는 소위 ‘중규직’이라 불리는 무기계약직이다.
물론 ‘무기계약직’은 청소노동자의 정년을 고려한 방안이다. 서울 공무직으로 전환되면 정년이 만 59세지만, 자회사 무기계약직은 만 65세로 정년이 더 길다. 하지만 무기계약직의 함정도 여기에 있다. 근로조건 개선 없이, 단지 고용만 보장하는 기형적인 형태. 이들은 과거의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또 있다. 민간 기업의 원-하청 관계가 그렇듯, 각종 노동문제가 발생하면 서울시와 자회사는 책임을 미루며 핑퐁게임을 한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관계자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가락동 농수산식품공사도 자회사를 만들어 시설관리, 환경미화 노동자를 고용했다. 하지만 4월이 되도록 지난해 임단협도 끝내지 못했고, 원청인 서울시와 자회사는 책임 떠넘기기만 한다”며 “정규직이라고 하면 그에 맞는 대우가 있어야 하는데 형식만 무기계약직일 뿐, 용역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비판했다.
생활임금 준다며
지난 4월 18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 지하철 양 공사 산하 자회사에 소속된 80여 명의 청소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날은 서울시의회 임시회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박원순 시장이 직접 온다는 소리에 노동자들은 일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달려왔다. 이들이 손에 든 피켓에는 ‘서울시는 지침대로 자회사 생활임금을 보장하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올해 최저임금은 6,430원. 그리고 서울시가 발표한 생활임금은 8,197원. 서울시의 ‘생활임금’이란 서울에 사는 노동자가 주 40시간 노동으로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주거비, 교육비, 교통비 등을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말, 2017년 서울시 생활임금을 발표하며 적용대상도 넓혔다. 기존에 적용 받았던 직접고용근로자 및 민간위탁 근로자 뿐 아니라 서울시 투자, 출연기관 자회사 소속 근로자와 뉴딜 일자리 참여자까지 확대 적용키로 했다.
하지만 서울시의회에 모인 청소노동자들은 “서울시는 2017년 생활임금을 공표했지만 서울지하철공사와 자회사는 지방계약법대로 1.46% 인상안을 내놓고 있다”며 “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는 실적급으로 받아온 식비를 통상임금으로 포함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울시에서 공문이 오면 지급하겠다며 서울시로 책임을 미루고, 서울시는 양 공사를 만나 검토하겠다며 확답을 피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노조 측은 식비가 고정적으로 지급된 것이 아니어서 통상임금에 포함될 수 없음에도, 공사가 생활임금을 맞추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박종오 도시철도 그린환경 5호선 지부장은 “서울시가 비정규직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놓고 번번이 약속을 어기고 있다”며 “4년 전에 자회사로 전환한 후 서울시와 자회사가 서로 책임을 미루는 통에 교섭은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간부는 “차라리 박 시장이 생활임금
정책을 철회했으면 좋겠다. 시장이 약속한 생활임금을 못 받아 준다며 조합원들이 우리 탓을 한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안전업무도 구멍 숭숭
서울시청에서 피켓을 드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또 있다. 도시 철도ENG 소속 시설분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서울시가 안전업무 직영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지난 2월부터 문제제기에 나섰다. 지하철 안전업무 직영화 문제가 불거진 건 지난해 5월 28일 발생한 구의역 참사 이후다. 사건 직후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의 생명 안전과 직결된 업무, 위험한 업무의 외주화에 대해서는 직영하는 방안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해 9월, 도시철도ENG의 전동차 중정비와 궤도 근무자 171명이 공사 안전업무직으로 직고용됐다.
하지만 안전업무 직고용 전환에서 배제된 이들이 생겼다. 소방, 위생급수, 냉방환기 등 역사시설 정비분야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심지어 소방 시설의 경우, 도시철도공사 기술감사처가 ‘직고용’을 주문한 안전업무직이다. 실제로 지난 2월, 5호선 광화문역 엘리베이터 설치공사 중 노동자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기술감사처는 감사의견서를 통해 “자회사 위탁 업무 중 안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방, 환기, (냉방)시설물 관리 인원에 대해 ‘안전업무직 전환’을 서울시와 적극 협의해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소방 뿐 아니라 위생, 급수, 냉방환기도 모두 안전과 직결되는 시설이다. 위생급수는 화재 발생 시 소방 공급용 으로 전환되며 불이 번지지 않도록 수막을 만든다. 공기 순환은 자동으로 연기를 빨아들이는 제연 설비로 바뀐다. 구의역 사고 진상조사단도 2차 보고서를 통해 “실제 현장 설비 및 인력 운용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소방설비만 전환하는 것은 공사 직영과 자회사 운영의 분리로 인한 효율성 저하를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공사 직영 전환은 적어도 시설관리 부문에 관한 한 전체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서울시는 지금껏 석연찮은 이유로 “검토 중이다”, “대책마련 중이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말만 앞선 정책에 실망하는 사람들
‘친 노동’의 이미지를 차용한 서울시의 정책은 그저 이미지로만 남았다. 그 정책들을 절실하게 바라봤던 노동자는 약속이행을 요구하며 서울시와 날을 세우고 있다. 변성민 의료연대서울지역지부 조직국장은 “박원순 시장 취임 후 정규직 전환, 비정규직 처우 개선 등의 지침을 매년 발표 하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감독하는 핵심적인 절차가 빠져있다”고 지적하며 “지침을 이행 하지 않아도 패널티가 없으니 지침을 지키려고 하는 곳이 없다”고 했다.
서울시에서 가장 큰 공공의료기관인 서울의료원 환자 이송 노동자 A씨는 부당한 계약 해지 철회를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A씨는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정규직, 비정규직이 혼재돼 일하던 환자이송 업무의 차별시정 판결을 이끌어낸 당사자이기도 하다. A씨는 “‘상시 지속적인 업무에 대해 정규직화 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던 서울시는 문제가 불거지면 뒷짐 지고 중재에 나선다”며 답답해했다. 선의에 기댄 정책, 디테일 없는 관리감독에 오늘도 서울시 기관 노동자들은 피켓을 든다. 노동정책관의 ‘검토해 보겠다’는 무심한 대답만큼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워커스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