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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운동: 홍콩 시위가 남긴 것

[57호] INTERNATIONAL2
2019년 7월 29일Leave a comment57호, INTERNATIONALBy workers

홍콩 시위대가 점거했던 입법회 [출처: Tam Ming Keung]

장정아(인천대 중어중국학과)


6월 한 달 동안 홍콩의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 시위는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가 주목했지만 최근엔 주로 ‘폭력적’인 충돌이 많이 보도되고 있다. 7월 1일 홍콩의 중국반환 기념일에 있었던 의회 난입 사건은 특히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젊은 시위대는 의회건물 유리를 깨고 들어가 몇 시간 동안 점거하며 곳곳에 검은 스프레이로 글씨를 쓰고 의장들 사진을 훼손했다. 이 행동은 홍콩의 오랜 자랑인 법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영국식민 시기의 홍콩 깃발을 내건 사진이 마치 이 날 행동의 상징처럼 오해되기도 했다.

 

그런데 많은 홍콩인은 이 날을 전례없던 ‘의회 난입’ 사건의 날보다는 “같이 나가자!(一齊走!)”는 외침의 날로 기억한다. 이 외침은 경찰이 자정에 강제해산을 통보한 위기상황에서 점거현장을 먼저 떠났던 젊은이들이 자정을 몇 분 남기고 다시 우르르 들어가 4명의 사수대를 번쩍 들어 데리고 나오며 했던 말이다. 이 외침이 울려 퍼지던 순간은 이번 시위의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 회자된다. 이 순간까지의 과정을 잠시 짚어보자.

 

이날 시위대가 의회에 들어간 배경에는, 한 달간의 시위 속에서 고조된 절망감이 있었다. 6월 내내 이어진 시위에도 정부는 ‘잠시 연기’라는 법적 효력 없는 애매한 말만 했을 뿐, 시위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폭동이라는 규정을 철회하고, 경찰의 과잉진압 조사와 법안 철회, 체포된 시위대 석방 및 추후에도 기소하지 말라는 요구는 모두 거절당했다.

 

6월 말 G20 정상회담 기간에 홍콩 문제가 거론되길 기대하며 홍콩 네티즌들은 세계 주요 신문에 전면광고도 싣고 영사관들에 청원서도 전달했다. 하루만에 10억 원이 모여 세계의 신문들에 광고를 싣는 등 홍콩인들은 스스로의 힘에 크게 고무됐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기대와는 달리 28, 29일 G20 회담 기간 미국이나 영국은 홍콩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변화도 없는 상황에서 연일 시위가 계속되며 29일과 30일에 2명의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월 15일 항의하다 추락사한 이까지 포함하면 희생자의 수는 3명이다. 30일 밤 추도회에서 한 젊은이는 무대에 올라가 “친구들이 죽어가도 (잡혀 갈까봐 신분 노출을 피하려고) 마스크를 쓰고 추도해야 하는 울분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곳곳에서는 친정부파 집회와의 충돌과 부상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환기념일을 맞아 수십만 명의 시민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행진을 했는데, 일부 시위대가 오후부터 의회 건물 유리창을 깨며 진입을 시도했다. 당황한 민주파 의원들이 달려와 말리자 이들은 “우리 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자꾸 절망해서 3명이나 죽었다. 그 책임을 우리가 지려 하니 비켜라”고 말하며 계속 유리를 깼다. 온라인에서 많은 이들이 반대하며 ‘끝까지 평화적으로 해야만 민심을 얻는다’고 주장했지만, 한편에선 ‘200만 명이 나와도, 3명의 희생자가 나와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데 더 이상 무슨 민심을 더 얻으란 말인가’하는 정서도 팽배했다.

 

[출처: Wpcpey]

[출처: Wpcpey]


“같이 들어갔으니 같이 나오자”

 

초반엔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진입 시도 시간이 길어지며 온라인도 현장도 분위기는 달라졌다. 결코 그 행동에 찬성할 수는 없지만 존중하자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서로 갈라서거나 비난하지 말자’는 것은 이번 시위 내내 핵심 슬로건이었다. 행진을 끝낸 이들 중 상당수가 그들을 보호하려고 의회 주변으로 갔다.

 

결국 유리에 구멍이 뚫렸고, 무장한 경찰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며 누구라도 들어오면 체포한다고 했다. 최루탄이 터지는 긴장된 상황에서 갑자기 건물 안 등이 꺼졌고 경찰들은 철수했다. 일부에서 의심하듯 일부러 시위대를 유인한 건지, 아니면 경찰의 설명대로 진압 준비가 안 됐다는 판단으로 철수한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시위대는 안으로 진입했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4년 우산혁명 때도 소수의 시도는 있었지만 대부분 시위대의 강렬한 반대 속에 무산된 적이 있다.

 

의회 안으로 100명 넘는 이들이 들어갔고, 사방에 검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글씨를 썼다. 언론에 많이 나온 영국식민 시기의 홍콩 깃발은 일부가 잠깐 꺼냈다가 바로 내렸고 결코 이 날 시위대의 요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정 집단이나 파벌의 시위대가 의회를 점령한 것도 아니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 와중에도 ‘의회 도서관에는 희귀 자료가 많으니 훼손하면 안 된다’, ‘의회 내의 보물은 훼손하면 안 된다’ 등 전달받은 정보를 공유하며 시위대는 도서관과 보물 앞에 ‘파괴 금지’라고 손글씨를 써 붙였다. 건물 안 식당 냉장고에서 갈증을 달랠 음료수를 꺼내 마신 이들은 ‘우리는 도적이 아닙니다’라고 써놓고 동전을 놔뒀다.

 

경찰의 강한 경고가 이어졌고, 의사당 안에서 시위대는 토론 끝에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나기로 했다. 당시 시위대 사이엔 공포가 팽배해 있었다. 이미 수차례 플라스틱 총탄을 맞은 부상자가 나온 상황에서 가장 수위가 높은 시위행동을 벌인 이 날은 최악의 상황까지도 상상해야 했다. 남아 있다가 어떤 위험한 상황이 될지 모르기에 다 함께 여길 나가자며 우는 이도 있었지만, 유서도 써놓고 왔다며 끝까지 남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의 젊은 남자가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놀랐다. 우산혁명 이후 몇 년 후까지도 정부는 시위 참가자를 잡아내 기소하고 체포했다.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한 마스크와 고글이 필수품이 된 상황에서, 그는 감옥에 갈 위험을 무릅쓰고 얼굴을 드러내며 외쳤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지금 여기서 나가 내일 집에서 에어컨이나 편하게 쬐면, 우리는 언론에서 폭도로 나오고 끝나는 겁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납니다. 그렇게 또다시 질 수는 없습니다. 우린 여기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함께 남을 수 있는 분들은 남아주세요. 숫자가 많을수록 안전합니다.” 그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말하길, 대중이 파괴행위만 기억하고 폭도로만 보는 걸 원치 않았기에 마스크를 벗고 진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사수대는 4명이었다. 그 날 밤은 너무 위험하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온 젊은이들은 의회 앞에서 다시 토론을 했다. 의회 안에 남은 이들을 데리고 나올 것인가,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하지 않는가, 토론은 격렬했지만 “같이 들어갔으니 같이 나오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경찰의 강제해산이 예고된 자정을 7분 남겨놓은 시각, 일부 시위대는 다시 들어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기로 했다. 그들은 들어가며 확성기로 밖에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나오는 동안 시간을 벌어주세요”라고 부탁했고, 건물 주변 그리고 도로에 있던 이들은 최루탄 속에서 바리케이드를 쳤다. 수십 명의 젊은이가 뛰어들어가 4명의 사수대를 번쩍 들고 나오며 외쳤다. “같이 나가자!(一齊走!)” 기자가 그들을 따라가며, 당신도 위험한데 왜 들어왔냐고 묻자 한 젊은이는 울먹이며 “나도 무섭고 겁났지만 내일 아침 저들을 못 보는 게 더 겁났어요”라고 답했다.

 

이 날 들어가서 사수대를 데리고 나온 이들 중 한 명은 이틀 후 ‘남아서 사수하려던 이들에게’라는 공개서한을 언론에 보내 이렇게 썼다. “당신들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박탈하고 데리고 나와서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상황은 너무 급박했고, 우린 당신들이 희생될 줄 알면서 도저히 두고 나올 수 없었다. 우리는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홍콩인이고, 한 명도 더 이상 잃어선 안 된다. 우리 이제 앞으로도 다 함께 들어가고 다 함께 나오자.”

 

2014년 우산혁명 때는 폭력을 써야 할지, 언제 물러나야 할지, 언제까지 도심을 점거해야 할지 토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서로 공격과 비난만 높아지다가 결국 무력하게 해산되며 끝났었고, 그 후 몇 년간 홍콩의 사회운동은 현저하게 쇠락했다. 의회 의원의 자격이 박탈되고 정당활동이 중지되고 수십 명이 기소되고 수감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몇 년의 아픈 경험은 교훈을 남겼다.

 

올해의 법안 반대 시위가 이렇게 대규모가 될 줄은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만, 홍콩인들은 빠르게 교훈을 습득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의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에도 서로 최대한 비난을 삼가고 필요한 지원을 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려 노력한다. 최전선에 서는 이들의 행동에 지지하거나 동참할 수 없는 이들은 뒤에서 그들의 안전을 위해 애쓴다. 다친 시위대가 병원에 갔다가 정보가 노출돼 경찰에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면 의사와 사회복지사들이 현장으로 가 응급조치 봉사를 한다. 항의시위를 하다 추락사한 첫 희생자의 시신도 자원봉사자가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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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의 끝과 또 다른 시작

 

이번 시위의 끝은 어떻게 되고 무엇을 남길까? 정부는 법안 철회를 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죽은 것’이라고 애매하게 말한 상태다. 일반 시민 사이에서 여론은 조금씩 갈리고 있다. 일단은 11월에 있을 구(區)의회 선거에서 최대한 민주파가 많은 의석을 얻는 것을 목표로 당분간 시위는 계속될 테다. 그러면서, 승리도 패배도 아닌 상태가 계속되며 다들 조금씩 지쳐갈 것이다. 이미 극심한 피로감과 절망감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겉으로 보기엔 얻은 게 없는 듯 보일 수도 있고, 체포된 이들, 다친 이들, 그리고 곳곳에 시민들이 민주화에 대한 소망을 써서 붙여놓은 메모지만 남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 메모지마저 친정부파 시위대가 거칠게 뜯고 발로 밟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게 남은 것들은 많다. 우산혁명 때 홍콩인들은 도심을 대거 점령한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대단한 행동이라 여겼고, 경찰이 최루탄을 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받아 울곤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행동이 끝내 패배할 거라고는 생각 못한 젊은이들이 많았고, 그랬기에 패배 후 충격은 오래 갔으며 서로에 대한 공격도 심해졌다. 이제 그들은 진화했다. 도심 점령의 모습은 마치 이소룡(브루스 리)의 말처럼 ‘물처럼 흐른다’.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 정부 건물도 잠시 포위했다가 해산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즉석 토론으로 향후 행동을 결정하며 서로 비난하지 않는다. 중앙 무대가 필요없고 각 지역마다 이름 모를 네티즌의 제안에 각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행동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시위를 낭만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중국 본토인에 대한 배타적 정서가 다시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고, 서로의 ‘폭력적’ 행위를 비난하지 말고 존중하자는 말은 과연 어디까지 유효할지 알 수 없다. 여전히 비폭력에 대한 강박관념이 압도적인 홍콩사회에서 ‘폭력’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정말 그 책임을 다 함께 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숙고도 토론도 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이번 시위를 거치며 일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 평소 지나다니던 조그만 가게들이 하루 휴점을 선포하고 시위에 참여하며 주민들을 놀라게 한 일, 엄마부대·아빠부대·흰머리부대의 등장은, 이번 시위가 결코 소수 정치인과 시위대에 국한되지 않으며 도심부에서 일어난 일회성 정치행동에 그치지도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성패는 단기적 시각으로 쉽게 예단할 수 없다. 한 대만인이 쓴 글에 따르면, 2014년 대만의 해바라기운동은 이긴 듯 보였고 홍콩의 우산혁명은 아무 것도 못 얻고 패배한 듯 보였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대만은 새로 들어선 차이잉원 정부와 제도권이 사실상 운동 역량을 흡수해 버려 사회운동은 오히려 활력이 없어졌고, 반면 홍콩은 새로운 운동이 폭발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는 ‘누구도 다른 이를 포기하지 않는’ 운동을 대만인들이 홍콩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쓰고 있다. 가능성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열린다. 이렇게 열리는 새로운 가능성은 아름답고 좋은 가능성만이 아니라 위험과 불안까지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 가능성이 어떻게 열리며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위험과 불안은 또 언제 어떻게 예기치 못한 새로운 시작의 토양이 되는지 길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워커스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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