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라는 곳에서 연구원 겸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를 연구해 왔고, 최근에는 대중의 정서 구조 변동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호구’ 신세에서 정치적 불만의 누적
처음 접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역사가 장벽에 가로막힐 때마다 이를 허물고 새로운 세상을 열던 ‘청년’은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 투쟁은커녕, 투표소에 들르기만 해도 감지덕지일 정도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20대의 투표율은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18대 총선에선 28.1%에 불과했다. 근현대사를 통틀어 청년들이 이토록 탈정치화된 전례가 있을까. 진보 성향은 요원하고 냉소와 혐오가 판을 치니,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20대 개새끼론의 골자는 이게 다 청년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20대 총선에서 20대는 무려 49.4%의 투표율을 보였다. 야당은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선거철마다 반복되던 20대 개새끼론도 소실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청년들이 꽤 많이 투표를 했고 야당이 이겼다. 오늘날의 20대가 8년 전 20대보다 선거에 더 적극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 같다. 당사자인 20대로선 기성세대로부터 욕먹지 않아도 되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정치의식을 두고 당분간은 예의 불편한 언사로 입방아를 찧거나 마음에 담아 둘 일은 없게 생겼다.
하지만 관전자 입장에선 괜한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결국 둘 중 하나 아니겠는가. 청년을 향한 힐난이 왜 수그러들겠나. 1번, 20대의 정치 참여 수준이 높아져서. 아니면 2번, 굳이 누군가에게 화풀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황이 나아져서.
예전 얘기를 해 보자. ‘20대=개새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동안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호구’나 다름없었다. 어느 분야에서건 어떤 상황에서건 20대는 포로 상태였다. 수탈적 경제 구조에서 ‘88만 원’ 현실을 전전하다 인턴 나부랭이로 입사해 ‘열정 페이’로 털리고, 그렇게 아등바등 몸부림쳐 봤자 돌아오는 건 ‘스펙 쌓기’ 물신 숭배자 취급이 고작이었다. ‘N포’ 신세로 먹고사는 것 자체가 투쟁인데도 제도 정치를 등한시했다는 이유로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마저도 감내해야만 했다.
8년 전 혹은 4년 전의 청년 세대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만 하는 상태였다면, 그 사이 20대의 삶을 두고 꽤나 급진적인 쟁점들이 제기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일련의 일들은 가히 필연적이었고 또한 돌발적이기도 했다. 십수 년간의 불행이 누적되면서 청년들 사이에서 ‘안녕’을 묻는 바람이 불었고, 한국 사회가 봉건적 착취·세습 체계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이 널리 간파되었다(‘헬조선’과 ‘흙수저’). 급기야 세월호 참사로 인해 국가의 무능력마저 낱낱이 노출되기에 이르렀으니, 이쯤 되면 경제적 불안과 공포로부터 비롯되었을 체념적 정서는 정치적 불만이라는 잠재적 에너지로 발화될 만도 하다.
정치 주체로의 머나먼 길
자, 정말로 20대는 호구에서 문자 그대로 ‘청년’으로 환골탈태한 것일까. 저들의 선배 세대들과 달리 오롯이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정치라는 게 참 묘하다. 이를테면 투표에 참가한 것만으로 정치적 행동을 판가름할 수 있을까. 혹은 거리에 나와 짱돌을 드는 것으로 정치의식을 가늠할 수 있을까. 이건 다분히 모호한 문제인데, 정치라는 관념을 어떻게 한정 짓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답을 낼 수도 부정적인 답을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각자도생의 세계를 살아 내기 위해 처절하게 버티는 건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정치란 뭐란 말인가. 정치라는 두 글자를 둘러싸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어떤 본질적인 정의 같은 것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정치는 투표’라는 흔한 등식에 비춰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떤 자료를 보더라도 20대들의 투표율만 알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이 정말로 야당을 찍었는지 그리고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말 청년들 때문에 야당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은 오랜만의 여소야대 정국이 청년들 덕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여당과 박근혜 정부의 자중지란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이지 않았나. 투표라는 아주 기본적인 권리만을 행사했을 뿐, 그들이 어떤 대단한 집합 행동에 나서고 정치적 주체로 거듭났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투표가 정치의식의 발현이라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이를테면 현 정권에 대한 피로감이 임계점을 넘은 상황이라면, 이때의 투표 참여는 자기-원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외적 상황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지지하는 정당과 인물을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아야 할 정당과 인물이 더 결정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선거 막판 여론 조사에서 야당 쪽에 위기감이 감돌았던 것도 마찬가지다. 보수 대결집 운운하면서 투표장에 몰려들던 노년층이 새누리당으로부터 이반했다는 지적은 차라리 반면교사로 삼는 게 나을 성싶다. 청년들 역시 언제든 선거판에서 이탈할 수 있다. 사전 투표가 활성화된 건 또 어떤가. 달리 말해, 투표 자체가 촉진될 만한 상황이긴 했으나 그것이 정치의식을 반영한 사건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맥락은 청년이라도 다 같은 청년은 아니라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세대라는 것이 생애 과정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독특한 집합적 속성을 가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그 시절 그렇게 취급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종종 이들을 세대라 이름 붙이기 좋아하고, 단지 그 사실만으로 이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퉁치고 넘어가기 일쑤다. 물론 우리 시대 청년에 대한 지배적 표상들처럼 이들 중 상당수가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할 구조적 압력에 처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성별에 따라, 학력과 학벌에 따라, 그리고 가족적 배경에 따라 역사를 체험하는 방식은 물론 그 기억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주체라는 지위에 뭉뚱그려진 범주로서 청년을 올려놓는다는 건 다소 허망한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닌가.
20대 책임론 이후의 국면은?
청년들의 투표 참가로 정세에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아직은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하지만 이쯤에서 명확해지는 건 이번 총선으로 인해 지난 몇 년 동안 출몰해 왔던 20대 책임론의 허구적 성격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란 사실이다. 청년들의 투표율이 높아져서 야당이 승리했다? 애초부터 20대 책임론자들은 그런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물증도 없다. 그냥 야당이 연패하는 데 여러 이유 중 하나를 꼽았을 뿐이고, 답답한 마음에 그저 허공에 주먹질이나 해 댔을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의 외연 자체가 대의민주주의로 한정돼 있으니 선거에서 이긴 걸로 그뿐, 굳이 누군가를 색출해서 욕할 일도 없어지기 마련이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20대 당사자들이 투표를 안 해서 삶이 곤궁해지고 있다는 핑계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됐다. 투표를 했고 어쨌든 야당은 이겼다. 어떤 국면이 지나간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 청년을 둘러싼 담론 전쟁은 어떤 구도로 펼쳐질까. 이참에 이런 생각을 하나 해 본다. 정말로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 청년들이 선거판 바깥, 그러니까 학교와 직장 그리고 가정 등에서 어떤 정치적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데 있지 않을까라는. 우리는 과연 해묵은 프레임을 넘어 새로운 지평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정치라는 말은 언제나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