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그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성지훈 기자 / 사진 홍진훤
몇 년 전부터 ‘일베’가 사회 문제로 대두했다. 극우 보수 정치 성향의 커뮤니티, 패륜과 범죄의 온상, 여성 혐오의 메카. 일베에 대한 말들은 숱하게 쏟아져 나왔지만 그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을 진중하게 살펴볼 만하면 자기들이 먼저 나서 사고를 쳤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것이 어떤 의미이든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미친 곳’은 일베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위클리매드코리아(위매코)’가 같이 미쳐 볼 건 ‘일베’다. 위매코 주제가 정해지고 난 후 기획 회의 때 한 선배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코너의 특성상 싫은 사람들,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겠지만 그들을 혐오하고 조롱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들을 향한 따듯한 시선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이번 주제야말로 그 조언을 새기기에 가장 적절했다. 그들을 조롱하지 않고 그들을 단지 혐오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짐과 생각 역시 내가 그들을 얼마나 단순하게 파악하고 판단했는지를 알려 주는 일이었다.
“일밍 하는 애들은 다 관종이에요”
“몇 달 동안 눈팅만 한 ‘뉴비’다. 지방 출신에 그 동네에서 지잡대 나오고 겨우 서울에 취직해서 왔는데 같이 술 먹을 친구도 하나 없어서 맨날 일베만 들어왔다. 일베가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어디 가서 일베 들어간다고 말도 못 했는데 솔직히 다른 동호회나 게시판들은 다 선비질 하는 것 같고 여기가 제일 솔직하고 맘 편한 거 같다. 요즘 삼겹살에 소주 엄청 땡기는데 같이 마시자고 할 사람도 없고. 솔직히 다른 사람들하고 만나면 내숭 떠느라 재밌지도 않고. 오늘 내가 삼겹살에 소주 살 테니까 나올 수 있는 사람 있냐?”
일베 유저를 만날 빌미로 술과 고기를 선택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삼십 대 남자들이 가장 열광할 만한 건 술과 고기다. 오죽하면 ‘주지육림’이란 말이 있겠나. 너무 많은 댓글이 달리면 어떡하나 했던 고민이 부끄럽게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단 하나도. 글을 올려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댓글을 체크했지만 글을 올린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내 게시 글은 10페이지 밖으로 밀려났다. 애초에 자극적이거나 재미있는 내용이 없으면 댓글을 기대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노무현을 욕하거나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글을 쓸 수는 없지 않나. 반응을 해 주는 착한 ‘일게이(일베 유저를 일컫는 용어다)’가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글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같은 내용을 붙여 넣기 하며 세 번째 글을 올렸을 때 처음으로 댓글이 달렸다. “여기서 친목을 도모하지 말고 혼자 놀아라.” (욕설과 은어를 정제하면 이런 의미란 거다. 술 사 준다고 했다가 이렇게까지 욕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워낙에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는 곳이다 보니 오프라인을 통한 모임이나 유저 간의 친목 모임이 형성되는 걸 꺼리는 풍토가 생긴 것일까. 커뮤니티 전체 공지에도 ‘친목ㄴㄴ’란 글이 올라와 있다. 커뮤니티가 회원들 간에 서로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대놓고 공지하는 곳이라니. 아이돌 팬덤부터 노사모까지 그래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친목질’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건만. 굴하지 않고 글을 계속 올려 다섯 번째 게시 글 만에 드디어 한 명을 낚았다.
“(역시 욕설과 은어를 정제하면) 26살의 대학생입니다. 저도 지방에서 와서 알바비로 버티느라 고기 같은 건 잘 못 먹습니다. 대학에서도 아웃사이더라 친구가 잘 없어요. 만나면 고기 사 주시는 겁니까?”
학교 친구 한 명과 동네 친구 한 명이 같이 나와도 괜찮냐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다. 다들 일베 유저라고 한다. 3명의 20대 남성 일베 유저들을 논현동 한복판의 고깃집에서 만났다(새마을 운동 노래가 흐르는 그 집이다). 삼겹살이 익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연락을 주고받던 ‘일게이’는 삼겹살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난 고기를 굽고 술을 따라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겨우 통성명을 하고 오늘 날씨와 이 집 고기 맛에 대한 요식적인 대화마저 끝나자 정말 숨 막히는 정적. 그 정적을 뚫고 나온 첫 대사는 “차돌박이 먹어도 돼요?”였다.
차돌박이 3인분을 추가하고 소주도 한 병 더 시키자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보다는 내가 적극적으로 질문을 퍼붓기 시작한 것에 더 가깝지만. “학교에서는 일베 한다고 하면 애들이 뭐라고 해?”
“학교에서는 일밍(일밍아웃, 일베와 커밍아웃의 합성어. 일베 유저임을 스스로 밝히는 일) 못 하죠. 일밍 하면 바로 왕따 될걸요. 요즘 여자 애들은 일베 한다고 하면 사람 취급도 안 해요. 일베에 일밍한 썰 올라오는 거 보면 다 ‘아싸(아웃사이더)’되고 그러잖아요. 굳이 일밍할 필요 있나요 뭐. 사실 일밍 하고 인증하는 애들도 다 ‘관종(관심종자,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일베를 하는 게 사회생활을 못 하게 할 만큼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일인데 굳이 왜 일베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 자리에서의 내 신분 역시 일베 유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은 불가능했다. 그저 나도 그 마음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일베 가 본 적 있어?” (올린 글이 인기를 끌어 ‘일간베스트’ 게시물이 된 적 있느냐는 질문이다.)
“없어요. 저나 얘네나 그냥 읽기만 하고 글은 별로 안 써요. 가끔 댓글이나 달고. 어차피 글 쓰는 ‘네임드(커뮤니티 내에서 유명세를 얻은 유저)’들은 몇 없어요. 다 그냥 댓글 달고 글 읽고 노는 거지.”
정치적 이슈에도 자기들은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일베를 한다고 다 ‘꼴보수’만 있는 건 아니라며. 자기는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진보라고 생각한단다. 이번 선거에서도 국민의당을 찍었다고.
“욕하는 걸 너무 많이 보니까 문재인이나 더불어민주당은 찍기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새누리당 찍기도 싫고. 그냥 국민의당 찍었어요.”
광주에 대해서도 폭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두환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세월호 농성장 앞에서 폭식을 하고 오뎅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도 자기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만 전라도 출신 친구들은 실제로 만나 보니 좀 간사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고향이 어디냐 물으니 경북의 한 중소 도시라고.
애초에 가진 선입견이었을까. 상정했던 일베 유저의 발언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데다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않은 태도, 일베 문화나 용어에 대해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반복해서 돌아오자 조금씩 앞길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고깃값만 날리고 별다른 얘기는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여태껏 한마디도 안 하던 녀석이 물어보지도 않고 삼겹살을 추가했다. 나도 열 받아 소주를 추가했다. 그냥 술이나 먹자.
여성은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했다
술잔이 더 돌자 분위기는 좀 더 무르익었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여자 이야기. 나와 연락한 일게이는 모태 솔로라고 했고 그 친구 한 명은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암말도 안 한다(말없이 삼겹살 추가한 그 녀석이다).
“솔직히 ‘김치’들은 돈 많고 학벌 좋은 애들한테만 다리 벌리잖아요. ‘보픈카(보지와 오픈카의 합성어다. 여성을 쉽게 유혹할 수 있는 좋은 차를 의미한다)’ 몰고 나오면 다 죽는 거지 뭐.”
클리셰 같은 대사에 이어지는 건 ‘김치년’을 중얼거리고 낄낄거리면서 불판 위의 김치를 젓가락으로 짓이기는 모습이다. “다 뚫어 버릴 거”라며. 그런 대화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박음직스럽다’는 말이 반복된 학교의 여자 후배 이야기, AV 배우 이야기, 여자 연예인 이야기까지. 그 대화 속에서 여성은 일상과 삶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했다. 인터넷에서나 보던 여성 혐오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순간. 하지만 그 목격에서 느낀 건 놀라움보다는 예상치 못한 이질감에 가깝다. 앞선 대화에서 난 이들을 ‘일베 유저’보다는 좀 ‘지질한 동네 후배 남자애들’처럼 생각했다. 삼겹살 사 먹기도 빠듯한 알바비,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한 예비역, 정치에는 별로 관심 없는 대학생. 대학 생활 내내, 그리고 살며 숱하게 봐 온 내 주변 남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이들이 너무 평범해 ‘별 얘기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했는데.
어쩌면 이들이 그 여성들을 대상화하고 혐오하고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혐오하고 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그랬고, 나의 돈 없고 가난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돈이 없고, 못생겼고, 인기가 없는 자신. 어쩌면 좋아하는 여자한테 좋아한다고 말 한번 하지 못할 만큼 지질하고 비루한 자신에 대한 증오와 자괴. 자신을 향한 것이든 다른 이를 향한 것이든 혐오와 비하만 잔뜩 얼룩진 대화가 계속됐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질수록 고깃집에 앉아 있는 많은 남자들의 대화, 그 대화의 내용들이라고 이들의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친구들이 일베를 하지 않겠지만, 만약 그들과 같은 대화를 하고 있다면 그들이 일베와 다른 건 무엇일까. 아니 일베가 내 친구들, 또 나와 다른 건 무엇일까.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들.
그리고 ‘2차’ 얘기가 나왔다. ‘와꾸가 좋은(외모가 예쁘다는 의미다)’ 여자들이 있는 술집 얘기, 어떤 업소에선 어떤 서비스를 해 주더란 얘기, 논현동에 있는 여성 중 대부분은 다 ‘업소녀’라는 얘기. 그러면서 날 자꾸 쳐다보는 것이 ‘오늘 놀아 준다고 했으니 업소도 데려가 달라’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말이 나왔으니 물었다. “어디 좋은 데 가 본 적 있어?”
현란한 업소 체험기가 줄줄이 나온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다 무언가 구체적으로 물으면 대답을 쭈뼛거린다. 이를테면 그 업소의 자세한 위치라든가 하는 인터넷에는 안 나올 것 같은 이야기들. 하긴 군대에서 작년에 전역한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하루 술값이 100만 원도 넘는다는 그런 곳엘 가 봤겠나. 다 인터넷에서(아마도 일베에서. 일베에는 그런 유흥업소 체험기도 꽤 많이 올라온다) 읽은 이야기들이겠지. 어설픈 무용담에 “너희 한 번도 안 가 봤지?”라고 물으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성매매 경험이 없다는 얘기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릴 줄이야.
스무살 무렵 군대에 가는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 집창촌에 가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 막 배우던 여성주의 텍스트들이 목에 걸려 끝내 거부했더니 친구들은 날 ‘배신자’ 취급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놀림감’이 됐다. 남자들의 문화, 추억, 우정 같은 걸 몰랐던 순진한 놈이라는. 성매매가 사회적 성숙을 의미하고 우정을 증명한다고 (여전히) 여기는 내 친구들이 다시 묘하게 겹친다. 그 친구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노력하고 진보 정당을 지지하거나 시민 단체를 후원한다. ‘일베’를 경멸하고.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건 많으면서 정작 2차를 데려가 줄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자 이내 열의가 식어 버렸는지 자리를 정리하려는 눈치다. 나도 취기가 올라 서둘러 계산을 마쳤다.
너흰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단 말이야
일베 유저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을 대상화하거나 나와는 다른 사회에 사는 것처럼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따듯한 시선도 운운했고. 그러나 기실 ‘다짐’을 해야 했다는 건, 내가 이미 그들을 나와는, 또 내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곳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과 지질한 대화를 나눌수록, ‘잉여’니 하는 말들로 나를 비하하며 낄낄거릴수록 그들에게 느낀 건 ‘동질감’이다. 그리고 그 ‘동질감’이 빚어낸 또 다른 ‘이질감’.
기사를 쓰는 지금은 5월 18일이다. 작년 오늘은 일베에 광주 항쟁을 조롱하는 글이 넘쳐났지만 올해는 오늘 아침 보도된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 사건으로 뜨겁다. 요지는 “특정한 사건 하나로 모든 남성을 일반화하지는 말라”는 주장. 일게이들이 말하는 ‘모든 남성’이란 표현에 눈길이 간다. 아무도 ‘일베’에게 모든 남성을 대표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일베’는 모든 남성을 대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성매매 경험을 자랑스러워하고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자기 비하와 연민을 타인, 약자에 대한 혐오로 해소하는 태도는 일베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남성 일반의 태도이기도 하다. 정치적 입장과는 상관없다.
혐오하거나 조롱하지 않는 기사를 쓰겠다는 다짐이 무색해졌다. 난 그들과 대화 이후 그들을 더욱 경멸하게 됐고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에 일베가 내뱉는 모든 말들이 불편하다. 고백하건대 난 그들을 혐오한다. 그렇지만 이 혐오는 어쩌면 그들에게 느껴지는 이 불쾌한 동질감을 제거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우린 너희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한 혐오. 나는 어떻게 그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워커스 11호 201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