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난 3월 30일, 강원도 영월군의 작은 마을. 이곳에 사는 60대 남성이 자택에서 자신의 여동생을 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을 이장이 현장에 최초로 도착했을 때, 남성은 숨진 여동생 옆에 쓰러져 있었다. 방바닥에는 석유가 뿌려져 있었고 남성은 의식 불명 상태였다.
사건 직후, 지역 언론에 짤막한 기사가 보도됐다. 일용직 노동자였던 한 남성이 뇌병변 장애를 가진 여동생을 살해한 뒤 동반 자살을 기도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이 추정하는 살해 동기는 생활고에 따른 비관. 사건은 완결성을 갖춘 통속물처럼 반짝 시선을 끌다가 이내 잊혀 갔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사건이 일어난 곳은 서울에서 차로 세 시간 거리. 주민이 1,000명도 되지 않는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다. 도보로 1시간이면 마을 한 바퀴를 빙 돌고도 남았다. 관광지 하나 변변찮아 외지인의 발길이 드문 곳이었다. 마을 길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낮은 지붕들 뒤로는 짙은 초록빛 산이 뻗치고 있었다. 고개를 어디에 두든 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산에 갇혀 버린 마을 같았다.
드문드문 마을 노인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시선은 낯선 외지인을 향해 오래 머물렀다.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는 한 식당 주인은 ‘이곳에서는 해 먹고 살 게 마땅치 않다’고 했다. 텃밭 수준의 조그만 농사를 짓고 있는 주민들이 대부분. 여느 시골 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은 진즉에 마을을 떠났고, 노인들만 남아 근근이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고 했다. 그녀도 두 달 전 마을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착했어요. 여동생이 장애가 심했는데, 둘이 살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재산도 없고, 하루하루 벌어먹어야 하니. 먹고살 것도 없는데.”
주변에 취직할 공장 정도는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에이, 나이가 60이 넘은 사람을 어느 공장에서 받아 주겠어요”라는 타박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는 탄식. 그녀가 그리워하는 마을의 전성기는 영월 광업소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탄광소로 모여든 젊은 광부들로 마을이 북적이던 시절. 이 마을 주민이면 누구나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마을 북쪽 끝머리에 뻗은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면 옛 탄광촌을 재현한 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산업 전사 위령탑’이라는 큰 돌덩어리가 날카롭게 솟아 있다. 위령탑 뒤로 세워진 작은 비석에는 누군지 모를 이름들이 빼곡히 차 있다. 돌덩이에 새겨진 248명의 이름. 탄광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들의 명단이다.
“우리 영감도 탄광 일 하다 돌아가셨어요. 영감도 거기(비석)에 있지.” 마을 슈퍼에서 만난 한 주민은 탄광 이야기부터 꺼냈다. 폐광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 뭘 먹고살아야 할지 근심했다는 이야기. 폐광된 후에는 그저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먹고살았다는 푸념. “여기 아무것도 없잖아요. 산밖에 더 있어요?”
탄광의 번성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마을의 호황은 노동자들 목숨의 대가였다. 쇠락한 탄광이 문을 걸어 잠글 무렵, 그 자리에 가난이 들어앉았다. 이제 더 이상 산업 재해로 사람이 죽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가난은 또 다른 죽음을 불렀다.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다 생활고로 살인을 저지른 그의 사연이 그랬다.
귀에 익은 사연
마을 길은 여전히 탄광의 호황기를 추억하고 있었다. 긴 담벼락을 따라 탄광 노동자의 형상과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공들여 그린 벽화는 마을의 명물이었다. 쇠락한 시골 탄광 마을이라지만, 골목은 아담하고 따뜻했다. 시와 소설이 새겨진 조형물들이 길가에서 반짝거렸다.
사건 발생 장소와 인접한 골목길. 두 달 전 일어났던 사건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평화로운 그 길에서 만난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그들은 동생을 살해한 장 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묵혀 있던 장 씨 일가족의 역사가 그들의 입을 통해 줄줄이 꿰어져 나왔다.
장 씨의 어머니는 그와 남동생을 데리고 오래전 재혼을 했다. 그리고 여동생 둘과 막내 남동생 하나가 태어났다. 여동생 중 하나는 장애인이었다. 부모가 일을 나가면 형제들이 그녀를 업어 돌봤다. 집 앞에는 개천이 흘렀다. 개천은 막내 남동생을 집어삼켰다. “네 살 먹은 애였는데, 물에 쓸려 갔어. 아버지가 물에 들어가서 애 찾느라 미친 듯이 헤매는 걸 봤어. 근데 못 찾았지.” 아버지는 15년 전, 나무에 올라 밭에 드리워진 가지를 자르다 떨어져 죽었다. 동생들은 가정을 꾸려 마을을 떠났다. 남은 사람은 장남인 장 씨와 장애를 가진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 세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동생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15년을 살았다. 장 씨는 쇠락한 마을에서 일거리를 찾아 전전했다. 그러던 중 작년에 어머니가 사망했다. 이제 장 씨와 여동생. 둘만 남게 됐다.
“저쪽 파란 대문이야. 집들 중에서도 아주 옛날 집이야. 오막살이같이.” 노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장 씨의 집이 있었다. 멀끔한 지붕 아래로 새카매진 벽체가 기울어져 있는 집이었다. 녹슨 우편함에는 장 씨의 이름이 희미하게 쓰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지워질 것만 같은 불안정한 글씨는 그의 노동과 많이 닮았다. 그는 계절마다 직업이 바뀌었다. 봄과 가을에는 일당 4만 8,000원짜리 산불 감시원 일을 했다. 길어 봐야 고작 1년에 넉 달짜리 직장이었다. 여름에는 마을을 돌며 모기 방역하는 일도 했다. 불안한 노동처럼 남매의 삶도 언제나 불안했다. 그와 특별히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누군지 물었지만, 주민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조그만 마을에서도 가난의 정도는 달랐다.
그의 집 앞 개천은 물이 다 말라 버려 움푹 파인 흙더미와 풀만 남아 있다. 난간에는 조선 후기 방랑 시인의 시구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세. 인간에겐 죄가 없으니 가난이 죄일세.’ 그가 집을 드나드는 길에 매일 마주쳤을 글귀다.
장 씨의 집 앞에서 기척을 낼 때마다 대문 뒤에 묶인 검은 개가 사납게 짖어 댔다. 덩달아 이웃집 개들도 합창을 하며 짖었다. 한 남자가 건너편 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그가 말했다. “내가 그 장 씨의 남동생이오.”
EP1. 서 있는 계절이 바뀌면 그들의 직업도 달라진다
풀이 무성해지고 습도가 올라간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도 들린다. 산에서 일하는 계절직 노동자들의 일터가 사라지는 시기다. 군청은 산불이 주로 일어나는 봄과 가을에 계절직 노동자를 채용한다. 강원도 영월에만 매 해 200여 명의 노동자가 산불 감시와 진화 등 산불을 관리하다 사라진다. 영월은 태백과 소백, 두 산맥의 영향으로 크고 작은 산들이 많다. 봉래산, 마대산, 구룡산, 완택산, 태화산 등 영월군이 자랑하는 산만 27개. 산이 모여 있다 보니 한 곳에서 불이 나면 바람을 타고 곧장 다른 산으로 옮겨붙는다. 119 소방대원이 모든 산불 진화 및 예방 작업을 책임지기란 역부족이다. 그래서 계절직 노동자들은 예방과 진화, 잔불 처리까지 산불에 관한 전후 작업을 도맡는다. 산불이 급증하는 시기인 봄과 가을. 딱 두 계절 동안만 그들은 산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프로 계절직 노동자도 불안하다
물놀이 안전 감시원 오 모 씨(65․ 남)를 동강 둥글바위 앞에서 만났다. 영월을 가로지르는 동강은 유속이 세다. 래프팅하기 좋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사람이 모이는 만큼 인명 사고도 잦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 전부터 물놀이 안전 감시원으로 일하고 있다. 산불 감시원 활동이 끝나고 다시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프로 계절직 노동자였다. 6년 넘게 산불 감시원을 했다. 물놀이 감시원 경력도 5년이 넘는다. 계절이 바뀌면 그의 직업도 바뀌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계절직 노동자’라는 호칭을 붙였다. 산불 감시원은 봄(2월 1일~5월 15일)과 가을(11월 1일~12월 15일), 물놀이 감시원은 여름(6월 4일~8월 31일)에 그의 직업이 된다.
산불 감시원은 주로 산불 예방 일을 한다. 마을에서 논밭을 태우거나 농산 부산물을 소각할 때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 그는 마을을 순찰하며 공동 소각을 유도하고, 공동 소각 할 땐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감시했다.
순찰이 주요 업무인 그는 하루에 20킬로미터 넘는 길을 왕복하곤 했다. 하프 마라톤 거리다. 지난해 ‘족저근막염’이라는 직업병까지 얻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빠른 걸음으로 왕복해 발목에 무리가 온 탓이다. 가끔 병원 신세를 져야 할 만큼 열심히 일했지만 그의 일자리는 위태롭기만 했다.
오 씨는 1년 내내 구직, 취업 활동을 했다. 계절직과 계절직 사이엔 공사판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인력 사무소에 그가 뚫고 갈 틈새는 별로 없었다. 얼굴깨나 비추고, 공사판 잘 아는 사람들이 1순위로 뽑혔다. 그의 부인은 농공 단지 봉제 공장에 다닌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생활은 늘 위태로웠다. “시골은 일자리가 없어요. 농사 아니면 막노동 밖에 없는데… 그나마 막노동도 나이 든 사람은 안 시키니까. 일하다 다치면 골치 아파지잖아요.”
영월군에선 매년 150명 내외의 산불 감시원을 채용한다. 일당은 약 4만 8,000원. 매년 최저임금에 맞춰 갱신된다. 취업 취약 계층에겐 가산점을 주기 때문에 저소득층, 장애인, 북한 이탈 주민, 이주민 등도 몰려 경쟁률이 높아진다. 경쟁률이 높아지니 테스트를 거쳐 거를 수밖에 없다. 50~70대들이 모여 체력을 겨루는 것은 진풍경이다. 올해는 산불 진화용 15리터 등짐 펌프를 메고 운동장을 돌았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는 겨우 두 계절 밥벌이가 될 뿐이었다.
계절직과 계절직 사이, 그 공백을 메우고 싶다
올해는 ‘선거 있는 짝수 해’다. 총선이 있던 짝수 해마다 강원도에 큰 산불이 났다. 강원도 전역은 징크스가 재현될까 잔뜩 긴장했다.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자 산림청은 강원도 전역의 산불 위험 등급을 ‘높음’으로 유지했다. 올 봄 영월군에선 작년보다 20명 늘어난, 60명의 산불 진화 대원을 채용했다. 손 모 씨(70․ 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산불 진화 대원은 119 소방대원처럼 현장에 출동해 직접 불을 끈다. 큰 불은 헬기나 소방대원들이 잡아 준다. 산불 진화 대원은 남아서 잔불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게 임무다. 산불은 산 표면에 있는 나무뿐만 아니라 장시간 쌓인 낙엽 등의 퇴적층에도 옮겨붙는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불씨가 옮겨붙기 때문에 꼼꼼하게 불씨를 없애는 게 중요하다. 주민을 상대로 산불 예방 선전도 한다. 올해는 방송차 세 대로 집중 선전도 했다. 열 번 이상 나던 산불이 올해는 반으로 줄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에게 힘든 점을 물으니 대뜸 초소에 홀로 있던 동료 이야기를 꺼낸다. 초소로 일을 나가려면 해발 300~500미터 산을 1시간 가까이 올라야 한다. 이동 시간은 시급에서 제외된다. 식비도 따로 없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다. 근무자는 초소에서 혼자 저녁까지 지키다 하산하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는 초소에서 일하는 사람은 좀 더 좋은 처우를 받았으면 하고 바랐다. “초소에 혼자 근무를 하는데 얼마나 외롭겠어요. 그런데 차비를 주나, 식비를 주나. 이런 사람들은 배려를 좀 해 줬으면 좋겠어.”
젊었을 적 사업을 했던 그는 5년 전부터 산불 진화 대원으로 일하고 있다. 산불 진화 대원 일이 끝나면 숲 가꾸기 등 다른 계절직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다. 그의 부인도 가끔씩 군청 일로 생계를 돕고 있다.
그는 영월의 일자리 가뭄을 호소했다. “영월은 옛날엔 경기가 좋았는데 이제 읍 단위는 똑같이 힘든가 봐요. 일자리가 없어. 특이 작물도 없고 중소기업도 없고 참 취직하기 곤란해요. 여자들은 소일거리라도 있지. 남자들은 아주 나빠요. 내 일당이 4만 8,500원인데 50~60대가 많이 하지. 40대는 별로 없어요. 이 돈으로 자식새끼 공부를 어떻게 시켜.”
계절직이 끝나고 찾아오는 공백 역시 고민거리다. 1년 내내, 다음 일자리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너 달 써먹고 끝나는 게 아니라 가을까지 벌이가 계속되게 하면 좋겠어요.” 그의 요구는 크지 않았다. 다른 계절직 일자리에 지원할 수 있도록 시기를 조율해 달라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영월 주민의 경우 사정이 조금 낫다고 해야 할까. 계절직 일자리 근무를 최대 2년까지 제한하는 지역도 있었다. 계절직 노동에서 미끄러진 노인들은 어디를 가야 할까. 갈 곳 없는 그들의 생활은 영월을 둘러싼 산 밑을 서성이고 있다.
(워커스15호 2016.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