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규
3인 가정의 외동아들. 부모님과는 데면데면하다. 아버지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대화가 없는 이 상태가 좋지만은 않다. 살가운 대화를 바라며 부모님께 말을 건네 보지만 본인도 그다지 살가운 편은 아니다. 군대에 가기 전엔 거실에서 지냈지만 제대 이후엔 방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
지수
막내딸. 가족 내 서열이 최하위이며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는 천덕꾸러기 역할을 수행 중이다. 청소년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막내로서 집안의 온갖 잡일과 심부름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
수현
서울에서 직장 생활 중이다. 현직 (수습) 기자. 담당 기자와 ‘마감의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대학 때 서울에 올라온 이후 집에는 명절 포함 1년에 서너 번 가는 게 전부다. 가족 내에서 ‘출가외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집에서 내놓은 건 아니다.
윤희
가족과 따로 떨어져 혼자 산 지 7년째다. 부모님과 다투고 갈등하는 보통의 청소년기를 보냈으나 대학에 와서 떨어져 살다 보니 오히려 사이가 더 좋아졌다. 남동생도 자신도 무던한 성격이라 부모님 생신 챙기는 정도가 아직까진 효도의 한계다.
안타깝기도 부담스럽기도
얼마 전 히트한 ‘응팔’(<응답하라 1988>)의 주제는 결국 가족이었다. 꿈을 묻는 딸에게 아버지는 “네가 행복한 것”이라고 답했다. 몸이 아픈 형을 위해 형의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는 동생도 나온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독일로, 베트남으로 자신을 팔았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엔 “참 잘 살았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비단 영화나 드라마뿐이랴. 사실 한국인에게 ‘가족’만큼 뭉클한 단어가 또 있을까. (‘국가’나 ‘민족’이 비슷하게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가족이 확대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고 쉽게 거절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절대 가치’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생겼을까. “가족끼리 왜 이래”, “우리가 남이가”.
그런데 정말 가족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일까. 어쩌면 가족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어서 그 반대급부로 너무 많은 상처를 받는 건 아닐까? 가족 안에서 나를 희생하는 동안 정작 개인은 지워지고 있진 않은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 고통은 정말로 대가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가족은 정말 애초부터 서로를 사랑하는 것일까?
지수 엄마는 8남매예요. 이모가 다섯 명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실 때 엄마에게 많이 의지가 돼 주셨어요. 편찮으시면 간병도 해 주시고. 그때 가족애라는 걸 실제로 느껴 본 것 같아요. ‘벼랑에 몰렸을 때 서로 도와주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역시 어렵고 아플 때 느껴지는 게 가족애인 것 같아요. 저도 아플 때 살뜰히 챙겨 주는 건 엄마밖에 없더라고요.
윤규 저는 가족애를 별로 느껴 본 적 없어요. 오히려 가족은 족쇄처럼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도 해 봤는데, 사람들도 동물처럼 그냥 개체로서 이름만 있으면 좋겠다는…. 무슨 때만 되면 부모님을 비롯해 친척들이 잔뜩 모이는 걸 보면 애정보다는 굴레가 느껴지죠.
수현 가족애가 있긴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제가 일을 그만두고 쉬고 싶을 때 부모님의 조력이나 가족이라는 기댈 언덕이 마지노선으로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가족이니까. 하지만 가족의 사랑과 부모님이 쳐 놓은 울타리가 혼동되기도 하죠. ‘응팔’에 나온 것처럼 ‘아빠의 꿈은 우리 딸의 행복’이라고 하는 장면 같은 건 실제로 모든 자식이 받는 부담이죠. 우리 엄마는 지금도 가끔 이대 졸업 반지를 끼고 다니세요. 그리고는 저한테 그러시는 거죠. “엄마처럼 살지 마.” 엄마는 당신의 인생에서 못 했던 부분을 저를 통해 대리 만족 하려는 거죠. 안타깝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요.
지수 전 가족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에요. 제가 스무 살 무렵에 가족이 서로 싸워서 엄마, 언니 저까지 전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 싸움 이후로 틀어졌던 관계가 봉합된 부분이 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굴었던 부분이 있었고 가족들은 “너도 가족인데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였어요. 그렇게 다툰 이후로 저도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좀 더 성실히 하겠다고 약속하고 엄마나 언니도 저를 더 이해하려고 하는 타협이 이뤄졌고요. 이후엔 어쨌든 좋은 사이가 됐죠. 가족애라는 게 애초부터 있었던 건 아니지만 다른 관계와 마찬가지로 타협하고 맞춰 가면 더 돈독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윤규 대화가 잘 안 되면 그런 기회도 없죠. 전 군대에 가기 전엔 원래 거실에서 지냈어요. 넓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좁은 제 방에서 지내고 방 밖으로는 잘 나오지도 않아요. 그게 더 편하고요. 집에서 대화가 거의 없어요. 어머니와는 사소하게라도 대화를 하지만 아버지와는 특히 대화가 없어요. 아버지는 무슨 얘기를 하면 다 거부하시는 것 같아요. 사소한 것도 제 생각을 얘기하면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로 다 틀렸다고 하세요. 겨우 인사나 하고 지내는 정도인데, 대화하고 다투면서 돈독해지기는 어렵죠.
수현 전 부모님과 내밀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살가운 편도 아니에요. 속 썩이는 딸이어서 내놓은 자식이 된 건 아니었고,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같이 안 살아서 더 그렇게 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술 먹고 집에 안 들어가도 걸릴 일이 없고 학교에 안 가도 혼날 일 같은 게 없었죠. 생활의 반경이 다르니까 아무래도 친밀함이 생기긴 어려웠죠. 남동생하고는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요. 걔가 중학생일 때 전 서울에 와서 걔랑은 사실 대화를 해 본 적도 별로 없어요. 안 친해요. 걔가 중고등학생일 때 수학 문제 풀어 주는 정도의 사무적인 대화만 해 봤어요. 언니랑은 또래라 좀 친한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전 집에서 출가외인의 느낌이 강하죠.
지수 제 친구는 휴대 전화에 자기 친오빠 이름을 ‘옆방에 세 들어 사는 남자’라고 저장해 놨어요. 생각보다 그런 집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 정도면 되게 화목하고 사이좋은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희생 혹은 독박
가족을 사랑하는 정도도 방식도 제각각이다. 어느새 대화가 끊어졌지만 단절된 대화를 속상해하는 건 대화의 복원을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협과 절충을 이끌어 내는 대화로 가족 간의 사랑을 돈독히 한다는 의미는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사랑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제각각의 가족사(史)의 기저에도 공통으로 깔린 한 가지가 있다. 가족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책임. 가끔 ‘헌신’이라 불리기도 하고 대부분은 ‘희생’이라고 이해되며 간혹 ‘독박’이 되기도 하는 그것.
윤희 가족을 위해 뭔가 희생하고 포기하는 그런 거는 너무 싫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나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어요. 저도 말 잘 듣는 딸보다는 조금씩 미리 실망을 시켜 놨고…. 착한 딸 노릇만 하면 가족을 위한 희생을 당연시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 나이를 조금 먹고 나니 부모 세대는 그런 기대를 하고 가족을 위한 희생을 요구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다 보니까 경제생활과 양육을 둘 다 하면서 이런저런 희생을 하는 걸 자주 봤거든요.
지수 아무래도 책임이나 역할은 경제적인 부분이 클 거예요. 우리 집은 언니가 직업이 있고 엄마도 경제적으로 힘든 건 아니어서 저에게 주는 부담이 크지는 않아요. 문제는 정서적으로 느끼는 가족에 대한 책임이죠. 정서적 부양이랄까. 지금은 정서적으로 제가 집에서 막내딸, 천덕꾸러기 역할을 하고 있어요. 1년 정도 집에서 나가 산 적이 있었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도 엄마가 적적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고민이 제일 컸고요. 문제는 언니가 먼저 결혼을 하면 엄마랑 나만 집에 있게 되는데 그때 엄마에게 제가 해야 할 역할이에요. 저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면 엄마는 완전히 혼자 지내게 되는데….
수현 부모님을 온전히 제가 부양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저도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부모님께 받은 게 있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일정 부분 갚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어떻게 보면 자기만족 같기도 하지만 그 부담 때문에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했어요. 저는 사실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활동가로 살고 싶었어요. 가족 부양에 대한 일말의 부담도 없었으면 아마 활동가의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나 부양에 대한 부담감을 정면 돌파할 수 있는 성격도 못 되고, 결국 현실과 어느 정도 절충한 진로가 기자였던 것 같아요. 명절 얘기가 나왔는데 어렸을 때는 명절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명절이 오는 게 싫어요. 사촌 형제들은 로스쿨에 의대에 임용 고시에 합격했는데 우리 집은 속된 말로 자식 농사 망한 상태거든요. 그것도 결국 부양 능력에 대한 평가일 거예요. 못 했던 부분을 저를 통해 대리 만족 하려는 거죠. 안타깝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요.
윤규 이제 졸업을 하고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해요. 그 고민에서 아무래도 부모님 생각을 떨칠 수가 없죠. 그러다 보니 정말 솔직한 결정을 하지 못해요.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부모님 부양 문제가 걸리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도 책임을 더 늘리고 얽매일 것이 많아지는 일일 거예요.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 부양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부담이 없는 건 아니죠.
윤희 우리 사회가 시스템으로 부모님의 노후를 해결한다면 온전히 개별적인 삶을 살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부양 부담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부모님이 조금 더 힘들어질 수도 있는 선택을 하는 것도 용기이겠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사회가 강요하는 가족의 역할 판타지
일요일 오후, 아버지는 신문을 보고 어머니는 과일을 깎는다. 여동생은 피아노를 치고 오빠는 아버지 옆에 앉아 책을 읽고. 공익 광고나 주말 드라마에 여전히 등장하는 정상 가족의 판타지다. 직장 상사에게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가족을 위해 이를 앙다물고 참아 내는 아버지의 판타지, 자식들과 남편을 위해 자신의 삶도 없이 가사 노동에 몰두하는 어머니의 희생 판타지, 결국 부모님을 이해하고 응원하며 효도를 다짐하는 효자의 판타지. 도무지 실제로는 볼 수 없는 판타지지만 세상이 강요하는 신화는 자꾸 자괴감과 부담감을 만들어 낸다. “왜 나는 효자가 아닐까?”
“나는 너무 못된 딸인가 봐.”
지수 효도는 지금의 제 또래들에겐 어떤 사회적 관례 같은 게 되기도 했어요. “부모님 여행 어디 보내 드렸니?” 같은 질문이요. 그걸로 자기의 사회적 지위나 책임을 과시하는 거기도 하고, 자기만족을 하기도 하고요. 사회가 강요하는 환상에 얼마나 부합했는지를 만끽하면서요.
윤희 사실 사회가 해야 하는 역할을 가족에게만 지우려고 하니까 자꾸 효녀 효자 판타지에 정상 가족 신화를 주입하는 거 아닐까 해요. 사회적으론 노인 복지나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 같은 게 전혀 없는데 그걸 모두 가족이 부담하는 게 옳은 것처럼 떠넘기잖아요.
수현 규정된 정상 가족이라는 판타지에서 벗어나서 각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가족 관계를 그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응원해 주는 가족이 좋아요. 간섭하거나 지시하는 게 아니라요. 같이 살면서 자주 보면 더 좋겠지만 안 되더라도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워하지 말고.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오래가는 가족 관계가 사실은 좋은 가족이겠죠.
윤규 전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떼쓰고 어리광 부리는 어린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거든요. 그게 지금의 제 삶에도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어른스러워야 하고 점잖아야 한다고 그렇게 혼나면서 컸어요. 나중에 가족과 제 아이가 생긴다면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가족 내부의 지위나 나이, 강요된 역할을 떠나서 대등한 대화가 되는 가족이었으면 좋겠어요.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의 환상 같은 건 싫고요.
가족은 애초에 숭고하지 않다. 그보다 애초부터 숭고한 것 따위는 없다. 그렇다고 가족이 하찮지만도 않다. ‘옆방에 세 들어 사는 남자’와 친오빠 사이엔 너무 큰 간극이 있다. 공간, 핏줄, 세월, 사연. 이런 것들이 뒤범벅된 가족의 의미는 저마다 제각각이다. 사회학 서적을 뒤적이면 가족주의나 재생산, 국가주의, 사회적 책임 같은 어려운 말들이 잔뜩 나오지만 그중에 무엇도 가족이 주는 상처와 굴레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미디어와 사회는 정상 가족의 환상을 강요하지만 사실은 정상이라는 말부터 폭력이다.
두 시간이 넘는 수다를 떨었지만 나온 결론이라곤 없다. 어차피 그런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주는 상처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됐고, 그걸 치유한 이름도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숭고하고 지긋지긋한 이름. 그 이름에 담긴 세월과 사연을 다 담기에 두 시간은 짧다. 그래서 어쩌면 이 대담에서 우리가 하고 싶었던 건 고작 확인이다. 누구에게도 ‘틀린’ 가족 관계란 없다는, 어느 가족도 ‘정상’이 아니라는, 그러니 처음부터 ‘정상’ 같은 건 없다는. 그리고 그 확인에서 시작하는 건 이제 새로운 가족의 관계. 그 새로움이 무엇인지는 또 제각각이겠지만.
(워커스4호 2016.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