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현실 정치인이자 사회주의자인 장 조레스(Jean Léon Jaurès, 1859~1914). 1904년 4월 18일에 진보적 일간지인 <뤼마니테(l’Humanité)>를 창간하여 그 주필을 맡았다. <뤼마니테>는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는데, 아직도 제호에 ‘창립자 장 조레스’라고 명기하고 있다. 조레스는 1914년 7월 31일 우익 프랑스 청년에게 암살당했는데, 그의 암살은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과 함께 1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킨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막스 갈로,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그가 암살당하자 유럽 대륙에서 반전의 목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는 프랑스에서 최고의 존경과 찬사를 받고 있는데,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원칙 때문일 것이다. 조레스에게 사회주의 원칙은 바로 ‘인간’이며, 따라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익과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에게서 폭력은 부정되며 반전 평화가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된다. 그가 공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이며 사회주의자인 이유이다.
그는 30년 동안 6선 의원으로 의회에서 활동했다. 프랑스 제3공화정 교육 정책의 수혜자인 그가 의정 활동을 공화파 의원으로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따라서 노동자의 계급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1892년 여름 카르모(Carmaux) 광부 파업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사회주의 의원으로 활동하게 되고, 암살되는 그날까지 그의 이념과 활동은 노동 계급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전개되어 사회주의 의원으로 남았다.
조레스에게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 번째 원칙은 사회주의가 노동 계급과 가까워야 하고 그 계급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168쪽). 이후 조레스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번째 원칙은 계급이 인간을 초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같은 책, 168~169쪽). 이 때문에 조레스는 혁명은 계급을 위한 것이라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지탄을 받았으며, 게드(Jules Guesde)와 라파르그(Paul Lafargue) 중심의 혁명파와의 반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조레스는 인본주의자였다. 그의 저작을 보면 사상적 원천이 인본주의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 당시, 대부분의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내부의 일’로 규정짓고 방치하는 상황에서도 홀로 의회 연단에 서서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서 개인을 지키지 못하면서 계급만을 지켜 낸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판단했다. 개인보다 국가와 군을 우선시하는 반동적 세력을 물리쳐야 하는 것은 공화주의자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의 책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혁명과 개혁의 융합을 지향했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원칙이다. 그의 사회주의는 당대의 소렐, 게드, 라파르그와는 달리 언제나 이견을 청취해서 ‘통합하고 종합’했다. 그에게 ‘개인주의’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자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는 통합론자였던 것이다(《장 조레스 그의 삶》, 196쪽).
그런데 그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후반의 유럽은 대체로 보통 선거권 제도(여성을 제외)가 수립되었는데, 이 새롭고 낯선 민주주의는 반대 세력의 경멸과 위협을 받기도 쉬웠다.
게다가 자유주의에 의해 구축되어 온 대의제는 유럽 사회주의가 정치에 기대를 두게 만들었다. 1880년대부터 유럽 사회주의는 정치권력의 쟁취를 목표로 하게 되었는데, 1871년 파리 코뮌의 유혈 진압과 1870년대 독일사민당(SPD)의 발전 외에도 이 같은 정치적 목표의 변화가 사회주의 변화의 요인이 되었다. 사실 사회주의 전체로 보면 정당이란 형태로 이념의 세력화를 도모한 것은 19세기 사회주의의 풍요한 자산인 아나키즘과 단절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 사회주의는 선거와 당과 노조와 대규모 집회와 인권을 모두 말하고 행해야 했다. 또한, 권력의 중심인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자본을 질타하고, 소규모지만 심오한 노동 잡지를 발간하고 대중 신문의 범람 속에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언론의 기틀을 세워야 했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민중이 권력의 향배를 쥐었던 혁명의 나라였던 만큼 대중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된 19세기 말에 대중에 대한 우려도 증폭되었다. 1880~1990년대에 르봉(Gustave Le Bon) 등의 대중 심리학 연구가 프랑스에서 성행한 것도 그 점에 기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화파 사회주의는 내부적, 외부적으로 여러 압력과 견제를 받고 또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조레스는 사회주의의 보편성과 프랑스적 특수성을 조화시켜 국민의 삶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당 통합의 산파 역할을 했으면서도 당권을 강경파에게 내주었으며, 사회주의의 ‘화합’과 인류의 ‘평화’라는 두 가지 희망을 모두 놓친 채 숨진, 현실에서는 ‘실패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후대에 남기고자 한 것은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계급 투쟁의 함성보다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회주의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21세기 현재도 그를 꺼내 들고 돌아본다. 수많은 대중이 그를 읽는다. 조레스는 ‘인민의 호민관’이라는 영예로운 묘비명으로 팡테옹에 안치되어 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도 있다. 2007년 대통령에 당선된 신자유주의 보수 우파 정객 사르코지, 극우파 국민전선의 여성 지도자 마린 르펜 등 우파 지도자들이 공공연히 그에 대한 존경을 드러낼 만큼 가장 대중적이고 사랑스런 정치인이자 사회주의자인 것이다.
사족. 조레스가 1878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할 때, 사범학교 동기로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등이 있다. 그는 수석으로 입학하지만 졸업 성적은 베르그송이 2등, 조레스가 3등이었다.
[그 외 참고 문헌]
– 노서경, <계급 이념과 정치 현장: 장 조레스의 사례(1892~1910)>, 《프랑스사 연구》 8호, 2003.
– 노서경, <공화국과 사회주의, 1898~1914: 장 조레스의 이념과 현실>, 《프랑스사 연구》 22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