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 자녀가 태어난 게 부끄러워 장애인들이 아이들을 시설에 버렸다. 그걸 쉬쉬 가리면서 세상은 굴러간다.’ 2010년 겨울 장애인극단 판에서 공연한 <불편한 상상>의 내용이다. 장애인 시설 문제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차별적인가를 미러링(mirroring)한 극이다. 필자도 장애인 리포터라는 단역배우로 참여한지라 기억이 생생하다. 연극 제목처럼 ‘불편한 상상’이라도 해야 우리 사회는 시설이 왜 문제인지 돌아보게 되는 것일까.
흔들리는 눈빛으로 본격화한 탈(脫)시설운동
1996년 에바다복지회, 1998년 양지마을, 송현원, 그리고 최근 2013년 원주 귀래사랑의 집, 2015년 시설 거주인 의문사가 밝혀진 해바라기 사건 등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잠깐 분노할 뿐 ‘왜 시설에서 인권침해가 끊이지 않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설이 존재하는 한 인권침해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CCTV가 있어도 막지 못한다. 시설이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을 사회로부터 추방해 집단으로 수용하는 곳이기에 폭력과 인권침해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격리와 배제는 폭력으로 이어지기에, 좋은 시설이란 있을 수 없다. 10년 넘게 탈시설운동을 앞서 실천한 ‘장애와 인권행동 발바닥행동’(발바닥행동)의 김정하 활동가는 탈시설운동의 첫발을 뗀 2009년 ‘마로니에 8인의 투쟁’을 회상했다.
“2005년 발바닥행동이 생기고 바로 탈시설운동을 하진 못했어요. 2~3년간 시설 내 비리와 인권침해로 싸워야 할 일이 워낙 많아서요. 2009년 석암재단에서 나온 시설거주 장애인들이 탈시설을 결의해줘서 가능했지요. 본격적인 탈시설운동을 이전에 해본 적이 없는지라 제안하는 저도 눈빛이 흔들렸는데 10분 만에 동의하시는 거예요. 그동안의 생활을 버려야 하고, 정부로부터 따낼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아 노숙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도요. 그분들이 나중에 말씀해주시는데 그간 싸우는 모습을 봤기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진 못하더라고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자유롭게 시설을 나오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게 부러웠다고. 무엇보다 그들의 자유가 부러워서 다시 조용한 자기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이는 석암재단 시설 비리 척결투쟁이 ‘좋은 시설 만들기’가 아니라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겠다는 ‘탈시설운동’으로 전환되는 선언이기도 했다. 2007년 만들어진 ‘성람재단 비리 척결 공동투쟁단’과 함께 2008년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을 결성하면서 서울시청 앞에서 50일간 천막농성으로 본격화한 것이 결실을 본 것이다. 이 투쟁으로 서울시에 탈시설 정착금이 확대되고 자립주택 제도가 생겼다. 당사자 그룹이 더는 시설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기에 탈시설운동은 힘을 받았다. 2013년 서울시는 ‘인권증진 기본계획’을 통해 탈시설 5개년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바로 전 만들어진 ‘서울시 장애인 탈시설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은 서울시에 탈시설을 촉구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설 인권이냐, 탈시설이냐
사실 해마다 시설 인권 침해가 벌어져도 장애 인권운동 진영이 탈시설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에 아무런 지원체계가 없는데 장애인들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냐며 “복지 선진국 모델처럼 지역사회에 정착할 기반이 없다, 장애인에게 헛바람을 주고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내팽개치는 것”이라고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2007년까지는 탈시설운동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시설 인권’부터 말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은 학습도 하고 미국이나 영국 등 해외 연수도 다녀오면서 탈시설 해외모델을 많이 연구했다. 궁극적으로 탈시설이지만 대외적으로 시설 인권으로 우회해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토론에 불꽃이 튀기도 했다. 그러다 활동보조인 서비스 제도가 생기는 등 사회적 여건이 변화하면서 탈시설을 받아들일 여건이 좋아졌다. 70년대부터 탈시설이 기본방향이 된 다른 나라에서는 탈시설 대상 장애인으로 발달장애인을 상정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신체장애인에 머물러 있다.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이나 일본의 자립 생활 운동이 들어오면서 재활에서 자립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어요. 초반의 자립 생활 운동진영은 탈시설운동으로 주요하게 활동하진 않았지만, 그 철학의 토대 자체가 반(反)시설이 전제된 것이에요. 장애인이 지역에서 자립생활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한 정책, 자기 결정이나 권익 옹호, 차별 금지 운동 등이 자립생활센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요. 지역에 기반을 둔 센터이다 보니 재가 장애인 중심이었고, 시설 거주 장애인의 문제를 다루기는 어려웠어요.”
발바닥행동이 시설조사와 탈시설운동을 하면서 고소당한 범죄 이름은 ‘유괴’, ‘주거 침입’, ‘건물 손괴’ 등 꽤 무섭다. 장애인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설에 갇히다보니 활동가들과 함께 시설에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활동보조 제도가 없던 시절인 2006년, 탈시설한 꽃님(별칭) 씨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보조도 했다. 노들야학 교사들과 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이 표를 짜서 일을 했다. 얼마 전에는 꽃님 씨가 자립생활 10년간 모은 돈 2000만 원을 자립생활기금으로 내놓았다. 40만 원밖에 되지 않는 수급비로 2000만 원의 기금을 모으느라 궁핍해졌을 그녀의 삶을 보며, 자유와 인권을 향한 의지가 얼마나 컸는지를 느꼈다. 2013년부터는 형제복지원 사건 대응을 하며 시설이 왜 국가 폭력인지를 알리고 ‘문제 시설이 아닌 시설 문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탈시설운동은 아직 서울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대구나 부산, 광주, 인천 등 장애인 운동이 강한 지역에서는 그나마 조금씩 흐름을 만들고 있다. 중앙정부의 의지가 없는 탓이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제정되면 탈시설의 법적 근거도 조금은 마련될 것이라고 김정하 활동가는 말한다. 법에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자립 생활할 권리가 있다는 게 명시됐기에 시설수용을 먼저 떠올리던 방향이 바뀔 수 있다고. 서비스 전달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복지서비스를 시설 운영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바우처든 현금이든 개인에게 주는 방식으로 바꿔야 장애인 복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복지 법인들의 입김을 막을 수 있다. 이렇게 정부정책이 바뀔 때, ‘장애인 가족들이 시설에 맡기는 방식으로 책임지는 과도한 가족주의’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