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물리면 끝장난다’, ‘평소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못한 A 씨가 사건을 조작했을 것이라 믿고…’ ‘성폭행 연기해놓고 신고해’, ‘물 만난 꽃뱀들’
꽃뱀 천국이다. 중년의 외로움을 공략하는 꽃뱀이 있는가 하면, 택시 기사를 노린 중년 꽃뱀에 외국인 꽃뱀까지. 모 유명 연예인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꽃뱀 같은 여자’의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금품 요구 협박을 받았다는 일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미디어는 꽃뱀을 열심히 실어 나른다. 꽃뱀의 수법을 설명하고 꽃뱀들이 결국 무고 처벌을 받는다며 성폭력 무고에 대한 경각심을 울린다. 꽃뱀의 수법이 ‘진짜 성폭력 피해자’를 의심케 해 더욱 경계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합의 하의 성관계를 성폭력으로 신고해 돈을 뜯어내고 인생을 망치는 꽃뱀’의 탄생기다.
물론, 뉴스 속 꽃뱀이 실존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범죄행위가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미디어가 퍼 나르는 뚜렷하지 않은 ‘꽃뱀’의 실체를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게 대입한다는 데 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꽃뱀을 덧씌워 자신의 기준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꽃뱀 아냐?’라고 생각하게 하는 사회적 통념이다.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 사건에 더해 꽃뱀이라는 의심을 벗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성폭력을 신고한 여성들을 ‘무고죄’로 몰아가는 검찰은, 이 같은 2차 피해를 양산한다.
피해자는 어떻게 꽃뱀이 되며, 무고죄 처벌 위기에 놓이게 되나. 《워커스》와 <한국여성의전화>가 이들 사건과 피해 기록, 관련 논문들을 살펴봤다.
# ‘그렇고 그런 여성’과 ‘피해자다움’
‘앞장서 유혹한다. 나중에 오리발을 내민다. 돈을 청구한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전형적인 꽃뱀의 모습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이 중 하나라도 의심을 받으면 ‘꽃뱀’으로 몰리고 곧 ‘무고죄 처벌’ 대상이 된다. 꽃뱀의 탄생이다.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사건과 무고죄 처벌은 ‘억울한 남성 피해자’를 연상시키며 이들이 악의적인 범죄에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데 집중한다. 꽃뱀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남성’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고, ‘죄 없는 남성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사법 시스템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성폭력에 대한 몰이해가 피해자인 여성을 꽃뱀, 무고죄 처벌 대상자로 몰아가는데 한몫한다.
이때 남성의 세계관에서 ‘그렇고 그런 여성’으로 보이면 더 쉽게 꽃뱀으로 지목 당한다. 기준은 남성의 판단과 시각이다. ‘잘 놀고, 잘 마시고, 남자와 잘 어울리는 경우’, ‘짧은 치마, 파인 옷을 입었을 경우’, ‘유흥업소에서 일하거나 일했던 경력이 있는 경우’ 등 상황은 다양하다. 이들을 ‘일반 여성’과는 다른 ‘그렇고 그런 여성’으로 분류하며 피해자가 아닌 ‘돈’이나 ‘협박’을 노린 범죄자, 꽃뱀으로 바라본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 상, ‘여성의 허위 신고’나 ‘여성의 다른 의도’를 캐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폭력이란 무엇일까. 여성이 처한 상황과 평소 행동, 직업이나 경력이 성폭력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성폭력은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성을 매개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뤄지는 모든 가해행위’를 뜻한다. 핵심은 피해자의 연령, 직업, 옷이 아니다. 성적 접촉에 있어 강제성이 있느냐의 여부다.
얼마 전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무고죄로 몰린 사건이 있었다. 강제추행을 고발한 피해자 B 씨의 경우다. 지난 2013년 B 씨는 지인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강제추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동석한 이였다. B 씨는 강제추행으로 상해를 입고 가해자를 고소했다. 어려운 결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당한 피해 사실이 아닌 ‘무고죄’의 혐의를 벗기 위해 3심에 이르는 재판을 받았다. 2년 8개월이 지나서야 무고죄에 대한 혐의를 벗었다.
당시 담당 검사는 피해자가 두꺼운 옷을 입었던 사실과 심리생리검사(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 등을 무고죄의 근거로 삼았다. 규정상 피해자의 건강 상태가 조사에 부적합했음에도 조사를 했다는 점은 무시했다.
검사가 이 사건을 무고 사건으로 인지한 것은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의 행동이 ‘성폭력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검찰 수사관은 고소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으러 온 피해자에게 “내가 성폭력 전담 수사관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피해자의 반응은 두 가지다. 화를 내면서 가해자의 뺨을 때리거나 매우 수치스러워하면서 피하는 경우”라며 “그런데 B 씨는 둘 다 아니다. B 씨 같은 피해자는 처음 본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했다. 피해자를 의심하고 추궁한 것이다.
검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범죄의 중대성과 증거인멸을 우려했다. 가해자·중요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를 우려해 피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며, 영장실질심사 당시 피해자에게 수갑을 채우고 법원의 영장 기각 결정 이후에도 5시간가량 불법 구금하는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피해자답지 않다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강요된 굴레이며 동시에 2차 피해다. 이 굴레를 벗어나려면 ‘피해자다움’이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무고죄의 대상에서도, 꽃뱀이라는 의혹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피해자다움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엄청난 충격 속에서 감정을 배제한 채 사건을 시간대별로 정확히 나열해야 한다. 폭력을 쓴 상대방이 오른팔을 사용했는지 왼팔을 사용했는지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나중에 번복할 시 피해자 진술에 대한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모든 구체적인 상황과 사람, 장소 역시 빈틈없이 기억하고 진술해야 한다. 허위 고발이 아니라면 피해자가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해내야 한다.
문제는 이 같은 정확하고 논리적인 사실을 기억해서 진술할 때 똑같은 이유로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는 데 있다. ‘피해자다움의 모순’이다. “피해자가 어떻게 충격을 잃지 않고 흔들림 없이 차분한가?”, “논리 정연함이 이상하다”, “피해자라면 당황하고 울부짖으며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와 같은 시선과 의혹을 받는 것이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은 하나 더 있다. ‘돈’ 문제다. 피해자가 합의나 ‘돈’ 이야기를 꺼낸 것이 밝혀지면 ‘처음부터 돈을 노린 것 아니냐’며 꽃뱀으로 몰린다. 무고죄 기소도 마찬가지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간한 <법조인의 성별 의식과 양성평등 교육 실태(2003)> 자료는 법조인들이 지닌 성폭력 사건에 관한 통념을 드러낸다. 자료에 의하면 법조인들은 ‘다른 범죄와 비교해 강간 사건의 경우 가해자에게 합의금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허위 고소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항목에 ‘그렇다’를 포함해, 80% 이상이 ‘강간이 허위 고소가 많다’고 답했다. 합의금을 뜯을 목적으로 허위 고소하는 여성이 많다는 법조인들의 생각이 드러난다. 하지만 처음부터 돈을 목적으로 고소하는 것과 고소 전후 가해자의 합의 종용 혹은 피해자의 육체적, 심리적, 경제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합의금 이야기는 다른 문제다.
강간 사건의 피해자인 C 씨는 피해자 추가 진술서에서 ‘법은 피해를 본 당사자가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도록 하고 있다. 20대 중반 여성이 세상에 드러내기 가장 어려운 성폭력 피해를 당한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피해자가 돈 이야기를 하고 손해배상 운운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며 오해받을 일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적었다. C 씨는 무고죄로 기소됐다.
피해자가 요구하는 보상은 권리가 아닌 피해자답지 못한 행위일까.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장은 “상대의 잘못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피해 회복을 위한 정당한 권리”라고 잘라 말했다. 조 국장은 “왜 성폭력 문제에서는 피해자가 합의의 ‘ㅎ’만 꺼내도 피해를 의심받는지 모르겠다”며 “유명무실한 성폭력 배상명령제도, 민사소송 진행의 어려움 등을 고려했을 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폭력으로 인한 손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법은 가해자의 무리한 합의시도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를 문제 삼으며, 사적 합의가 아닌 사법 절차에 의한 배상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 ‘상대방이 동의했는가’가 가장 중요
지난 8월, ‘피해자다움’에 대해 곱씹어볼 뉴스가 나왔다. 강간사건에 관한 캐나다 법원의 판결이다.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는 가끔 데이트를 하는 사이였다. 남성은 여성의 동의 없이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 남성은 ‘합의된 성관계’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해자인 여성을 ‘흥청망청 파티에 미친 여자’로 깎아내리고 그녀의 개인사까지 들춰내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해당 사건을 맡은 마빈 주커 판사는 남성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는 “여성 피해자의 평소 행실이 어땠는지, 과거 남자관계가 어땠는지 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동의했는가’ 일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빈 주커 판사는 ‘완전무결한’ 피해자 상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피해자가 술을 마셨건, 밤에 혼자 나다녔건, 어떤 옷을 입었건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친구 관계인데, 정말 강간한 게 맞아?’와 같은) 강간 피해자를 의심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판결문은 ‘혁명적인 판결문’으로 불렸다.
피해자는 어떻게 꽃뱀과 무고죄의 대상으로 몰리는가. 허민숙 연구원은 <성폭력 무고의 재해석>에서 “성폭력 신화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피해자에 대한 신화를 함께 창출한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전형적인 피해자 상과 들어맞지 않는 피해자의 모습을 통해 피해 사실을 의심하고 피해자를 가혹하게 비난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그리고 우리는 성폭력 문제와 피해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우리는 ‘피해자다움’, ‘그러게 왜?’라는 질문 없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지 되물을 일이다.
참고 문헌
<성폭력 무고의 재해석>, 허민숙, 한국여성학 제32권 2호, 2016.
<성폭력 피해 여성 무고죄 적용 요인 분석>, 강경화, 성공회대, 2012.
<꽃뱀이 성폭력 피해 여성일 수 있는 이유>, 변혜정, 당대비평,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