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넘게 이어진 노동조합 탄압으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결국 자살을 선택했던 한광호 조합원(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이 산재를 인정받았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 216일 만이다.
10월 18일 근로복지공단은 유족이 제기한 산업재해 인정 청구에 대해 고인의 자살을 ‘업무상 질병’으로 판정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유성기업은 고인의 죽음은 가족, 경제적 어려움 등 개인적인 문제에서 유발됐고, 우울증은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불법적 쟁의행위나 노조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줄곧 해왔다.
“사실 조사 출석요구서가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
고인은 지난 3월 10일 사측으로부터 사실 조사 출석요구서를 받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일주일 전이었다. 사측은 무단결근 및 잦은 조퇴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서였다며 해고는 전혀 예정된 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인의 예상은 달랐다. 유족에 따르면 이미 2011년 견책, 2013년 출근정지 2개월의 징계 경험이 있는 고인은 이번 징계가 ‘해고’로 이어질 것이란 불안감을 느꼈다. 고인은 올해 초 동료가 정신병원 치료를 권유하자, “형도 해고된 마당에 내가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 엄니는 어떻게 하냐”는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본인이 해고되면 집안 사정이 더욱 어려워짐을 걱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년간 노조탄압을 겪은 후 진행했던 다면적 인성검사(MMPI)와 상담 내용도 주변 동료의 진술과 같았다. 고인이 심한 우울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2013년 MMPI 검사 당시 고인은 우울증 고위험군 상태였다. 2014년 심리치유상담 때는 “모두가 힘든 상태”라며 “혼자 삭이면서 지낼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근로복지공단 질병판정위도 결과를 내면서 “수년간 노조활동과 관련한 갈등으로 인해 우울증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건 발생 1주 전의 사실 조사 출석요구서가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사건을 대리한 이상철 노무사(노무법인 이유)는 “노조탄압을 직접 인정한 건 아니지만, 사측이 컨설팅업체를 동원해 노조 파괴 공작을 하고 어용노조의 조합원들과 차별한 점 등이 인정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병원 기록 없어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되나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은 이례적이다. 이상철 노무사는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이 병원 기록으로 없으면 노동자의 자살에 관해 유족급여 청구를 불승인하는 경향을 보여 법원에서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노조에 대한 불이익으로 우울증세를 겪은 노동자가 산재 인정을 받은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고 밝혔다.
최근 대법원은 하급심을 파기하며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 인정 폭을 넓히는 경향을 보여왔다. 올해 초 대법원은 일터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로 극심한 우울증세에 빠져 자살에 이르게 됐다면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잇달아 내놨다. 상사와의 마찰, 고객이 주는 모욕감 때문에 자살한 노동자에 대해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증세가 유발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특히 대법원은 “우울증 치료 병력이 없다거나 개인적 취약성이 자살 결심에 일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진일보한 입장을 밝혔다.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는 이번 산재 인정 결과를 환영하며 노조활동이 정당했고, 회사가 부당노동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지회는 “유성기업의 노조파괴와 가학적 노무관리를 지시한 유시영 회장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있어야 하고, 노조파괴 배후에 있는 현대차에 대한 철저한 조사 및 처벌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