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건 자유주의의 약진, 진보정당의 곤경
지난 10월 22일, 일본에서 중의원 해산에 따른 총선거가 진행됐다. 총선거는 예상대로 자민·공명 연립여당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기대를 모았던 희망의 당은 기세를 잃었다. 다만 자유주의 지향의 입헌민주당이 제1야당이 된 것은 그나마 고무적인 일이었다.
한 달 전까지 일본 자유주의의 일익을 담당해온 민진당은 코이케 유리코 도쿄 도지사가 이끈 희망의당과, 자유주의 지향의 입헌민주당으로 분열돼 주목을 받았다. 희망의당 합류를 결정한 마에하라 민진당 대표는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강한 야당’을 주장했다. 입헌민주당을 설립한 에다노 유키오 민진당 대표대행은 수구보수에 의한 국가주의적 정책이 아닌 ‘입헌주의’를 이념을 내건 자유주의 야당을 주장했다. 결국 선거 민심은 ‘자유주의 야당’을 선택했다.
입헌민주당의 발족은 단순한 정치적 노선의 문제라기보다 자유주의를 지지하고, 공산당 및 사민당와의 연계를 주장하는 시민사회세력의 역할이 컸다.
시민연합은 전회(2015년) 중의원 선거 때 안보법제 폐지와 입헌주의 회복을 호소했던 ‘전쟁하지 않는다·9조 부수지 마라! 총동원행동 실행위원회’, ‘안보관련법에 반대하는 학자 모임’, ‘안보관련법에 반대하는 엄마 모임’, ‘입헌데모크라시 모임’, ‘SEALDs’등이 결집한 전국적인 시민 연합체다. 일종의 ‘일본의 촛불 시민’인 셈이다. 물론 ‘일본의 촛불’은 아베정부 교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아베정치에 저항하는 세력으로서, 정치가 ‘나가타초(국회)’의 숫자 게임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요한 존재가 됐다.
헌법개정
이번 중의원선거에서 아베 총리는, 뿌리 깊은 자위대 헌법위반 논쟁을 해소하기 위해 헌법 9조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개헌안을 호소했다. 자연스레 ‘헌법개정’은 선거의 쟁점으로 부상했다. 아베 총리가 ‘자위대 합헌화’를 목표로 내세운 것은 아베정부 정책에 있어 군사력이 얼마나 중요한 키워드인지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아베정부는 일미동맹과 동아시아 패권, 그리고 그 패권을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서 미래 일본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동아시아 패권을 추구하면 중국과의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제력·군사력에서 중국에 뒤쳐지는 일본은 일미동맹의 힘이 불가결하지만, 현 헌법으로는 아무리 일미동맹이 강화돼도 독자적인 군대가 없는 한 중국을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아베 정부도 중국과 군사적인 정면대립을 바라고 있지는 않다(고 믿고 싶다). 자위대의 임무는, 미국을 대신해 동아시아의 안전보장을 담당하고, 중국의 확대를 억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게도 이익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부담을 경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위대 합헌화에 따른 미제무기의 대량 매입으로 일미무역 수지도 개선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중국에서 동아시아의 군사적·경제적 패권을 되찾을 수 있다.
아베정부의 이러한 세계전략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한국은 물론, 일본 우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2015년 위안부 합의나, GSOMIA(한일비군사정보보호협정), ACSA(한일물품노역상호제공협정)등의 군사협정은 일본 동아시아 패권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 사실상 일본과 별 관계없는 북한 핵미사일에 대해 일본이 강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도, 자위대 합헌화의 구실이자 일미동맹 강화, 중국 압력용 트집거리일 뿐이다.
미완의 아베노믹스
‘아베노믹스’를 내걸고 발족한 2차 아베정부는 강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일본경제를 부양하려고 했다. 아베노믹스의 특징은 엔저에 의한 수출경쟁력 강화와 대규모 금융완화에 따른 투자 촉진이다. 이 같은 정책으로 아베정부 초기에는 각종 경제지표들이 일정부분 개선되기도 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현재, 아베노믹스가 내세운 목표달성까지는 갈 길이 까마득하다.
아베노믹스의 최대 문제는, 각종 정책들이 막대한 적자국채발행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최고의 국가부채로 일본은 파산 위기에 있다. 이번의 선거에서 아베정부는 현행 8%의 소비세(부가가치세)를 2018년까지 10%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일본경제가 증세부담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아베노믹스는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까. 현재 국민의 반대는 강하다. 게다가 재정건전화 목적으로 복지축소나 연금 등의 지급액 인하도 가속화되고 있다.
각종 경제지표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아베노믹스를 ‘성공적’이라 평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국가나 대기업의 대차대조표가 개선된다 한들, 서민의 가계부는 계속 악화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민사회의 대응
자유주의 입헌민주당의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시민사회는 아베 정부의 군사대국화와 신자유주의화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일본을 방문한 한국의 사회활동가들은 진보단체의 집회 및 시위에 고령자가 많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실제로 일본의 많은 2~30대 청년들은 자민당이나 희망의당, 유신의모임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당을 지지한다. 이번 선거 때도 청년층은 자유주의 또는 진보정당보다 신자유주의정당을 선택했다.
일본 청년들이 신자유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은, 청년층의 보수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우리들을 어려운 상황에 몰아넣은 것은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자유주의 탓이다”라는 생각이 있다. 그들은 노동조합 결성이나 각종 규제 도입을 주장하는 자유주의가 그들의 자유로운 사회활동을 제한하고, ‘평등’라는 미명하에 ‘역차별’로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에게 자민당은 낡은 헌법을 거부하고, 과감한 규제개혁으로 일본을 개혁하는 ‘멋진 진보’정당이다.
자민당은 언론 및 인터넷을 통해 자유주의 세력을 ‘기득권 수호’라고 선전한다. 유감스럽게도 정치투쟁을 포기한 일본의 노동조합, 특히 어용노조 관료들이 접수한 ‘렌고’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유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우리사회를 위해 싸우는 모습은 없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렌고’의 주체적인 움직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희망의당 합류를 저지해야 했지만, 초기에 ‘렌고’는 희망의당 합류를 부채질 하는듯한 모습을 보고, 노골적으로 공산당 배제를 명언하기도 했다.
애초부터 ‘렌고’는 공산당과의 공동투쟁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현재 일본 자유주의는 공산당을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이번 선거에서 역시 공산당을 둘러싼 동향이 큰 관심사다. 민진당의 분열도 공산당과의 선거협력 가부가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입헌민주당의 약진은 공산당과의 선거협력(단일화) 결과이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공산당 내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공산당은 시대와 함께 강령을 유연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결국 천황의 지위도, 자위대의 존재도 인정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추구해왔던 사회주의 혁명은 먼 미래의 꿈으로 떠나보냈다. 사실상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정당에 가깝다. 이전 공산당이라면 자유주의 보수와의 선거협력은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평화헌법의 위기에 서 있는 지금, 아베를 멈추기 위한 방법은 다른 길이 없다. 시민연합 등 시민 단체들은 우선 온건보수 자유주의 입헌민주당의 승리를 발판삼아 자유주의의 주장을 넓혀가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