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 등지려고…”
2012년 8월 어느 여름날 아침. 김주중 씨가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왔다.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후 부쩍 술 먹는 일이 잦았다. ‘쌍용차 해고자’라는 이름표가 번번이 그의 취업을 막았고, 기댈 곳이라곤 술밖에 없었다. 쌓여가는 빚처럼 스트레스도 늘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 거칠어졌다. 그날따라 괜스레 아내가 든 보험을 트집 잡았다. 김 씨가 해고된 후, 아내는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마트 캐셔, 물류센터, 나중엔 건설 현장까지 전전했다. 아내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서로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시비가 붙었다.
“보험부터 해지해, 그리고 나 지○○(동료 해고자)랑 고물상 시작할 거야.” 김 씨는 이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섰다. ‘쌍용차 해고자’라는 낙인이 찍힌 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고물상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벽돌 만드는 일로는 두 아들을 챙기기도 벅찼다. 결국 아내는 보험을 해약하기로 했다. 보험회사는 “본인과 직접 통화해야 해약할 수 있는데, 남편과 전화가 닿지 않는다”고 했다. 아내는 김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가출이었다.
연락이 끊긴 지 5일이 지났다. 걱정이 앞선 아내는 컴퓨터를 켜고 그의 카드 내역을 확인했다. 김 씨가 그날 새벽 4시 모텔에서 카드를 사용한 기록이 있었다. 아내는 회사에 사정을 얘기하곤 곧바로 모텔로 향했다. 김 씨는 잠을 자고 있었다. 아내는 그를 달래보기도 하고, 소리쳐보기도 했다. 그는 아내에게 3일 뒤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내는 하는 수 없이 알겠노라 했다. 바람 좀 쐬고 들어오라는 말을 남기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를 약속한 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카드 사용 내역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금서비스를 이용했다는 기록만 찍혀 있었다. 결국 아내는 평택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했다. 이틀 뒤,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분 지금 대천 보령경찰서에 있어요.” 평택에서 보령까지는 차로 두 시간. 바다 가까이에 있는 도시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김 씨는 현금서비스로 렌터카를 빌려 보령에 왔다고 했다. 저녁으로 조개구이에 맥주 두 병을 마셨다. 술을 원체 못하던 그는 금세 술에 취했다. 근처 노래방 종업원이 그에게 호객행위를 했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 술을 마셨다. 그러다 노래방 주인과 시비가 붙었다. 돈 때문이었다. 노래방 주인은 영업방해라며 그를 바닷가로 끌고 나가 내팽개쳤다. 그는 분한 나머지 나무막대기를 휘둘렀다. 그는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경찰서에 도착한 아내가 그에게 물었다. “왜 여기까지 왔어” 그가 답했다. “세상 등지려고….”
#2. 살아보려 발버둥 쳤지만
2012년 8월, 김 씨는 폭행죄로 구속됐다. 3년 반의 옥살이 끝에 2016년 3월 출소했다. 그는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 때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반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정리해고는 김 씨를 망가뜨렸고, 국가는 망가진 김 씨를 다시 감옥에 가뒀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졌다. 해고로 공장을 떠난 지 오래. 동료도 점차 멀어져 갔다. 서로가 서로의 빚이었다. 그를 찾는 전화도 뜸해졌다.
그는 수척한 모습으로 출소했다. 아내는 그에게 일을 나가라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옥쇄파업 당시 귀엽기만 했던 두 아들은 겁 없이 커가고 있었다. 아내 혼자 생계를 꾸리기는 벅찬 일이었다. 김 씨는 화물차 운전을 시작했다. 자정께 출근해 아침 6~7시에 돌아왔다. 월, 수, 금요일은 일산을, 화, 목, 토는 서울 곳곳을 돌며 화장품을 납품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씻기만 하고 건설현장으로 나갔다. 신축 건물에 보일러 배관을 설치하면, 그 위에 시멘트를 까는 미장 작업을 했다.
‘투잡’을 뛰어도 가세는 기울었다. 화물차 운전사는 개인사업자였다. 세금이 꼬박꼬박 빠져나갔다. 교통사고 처리비용은 모두 김 씨의 주머니에서 메웠다. 사고만 세 차례. 자꾸만 불운이 닥쳤다. 쌍용차에 다닐 때 살던 아파트를 나와 이사만 3번을 다녔다. 정리해고 후 2011년 아내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찾아간 대부업체, 2014년 아내가 지인의 소개로 간 저축은행. 빚은 쌓였다. 게다가 24억 원의 국가 손해배상으로 가압류된 재산만 1천만 원. 버틸 수가 없었다.
2018년 6월 27일. 그는 평택의 한 야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내에게 “그동안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시키고, 마지막에도 빚만 남기고 가는구나. 사는 게 힘들겠지만, 부디 행복해라”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였다.
#3. 잘 버틴 것이 아니었구나
2018년 7월 15일 일요일. 대한문 앞 고 김주중의 분향소. 해고자 동료 이 모 씨가 분향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씨는 공장에서 고인과 십여 년을 함께 했다. 그는 한 달 전 김 씨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2018년 6월 14일, 그가 사망하기 2주 전. 김주중 씨는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앞 촛불문화제에 참여했다. 문화제 후 편의점 앞에서 동료들과 커피를 마셨다. 그는 동료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애들 엄청 컸지. 말은 여전히 안 들어”, “미장일 그거 사람 할 짓이 아니야.”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는 언제나 동료에게 밝은 모습만 보였다. 그 미소 때문에 이 씨는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주중이형이 죽었단 게 아직 믿기지 않아요.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아요. 자꾸 죄책감만 들어요. 십수 년간 같이 생활했는데 그런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어요. 어쩌면 진작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주중이형 성격이 원래 그렇거든요. 속 얘기를 절대 안 해요. 응어리가 차다 못해 떠난 거예요. 주중이형이 힘든 걸 알면서도 막상 밝은 모습을 보니 잘 버티고 있구나 오해한 거예요. 내가 겉만 보고 놓쳤어요. 형한테 먼저 다가가야 하는데. 술 한잔하면서 깊은 속내를 듣고 보듬었어야 했는데….”
김 씨는 2009년 정리해고 명단이 나오기 전부터 투쟁을 결의했다. 정리해고가 닥치면 공장 안이 죽은 자와 산 자로 갈라질 게 뻔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현장모임에서 강하게 주장했다. 자신이 정리해고 명단에 없더라도 끝까지 같이 싸워야 한다고. 현장모임 동료 40여 명도 그와 뜻을 함께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선봉대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는 선봉대 제3지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2009년 8월 5일. 쌍용차 옥상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됐다. 그는 경찰 방패에 찍히고, 군홧발로 짓밟혔다. 바로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 씨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분향소에는 욕설과 폭력이 난무했다. 보수단체는 분향소를 향해 ‘시체 팔이 그만하라’고 방송을 했다.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흔들고 사이렌을 울렸다. 이 씨는 옥쇄파업 당시 공장 옥상을 떠올렸다. “2009년 공장이 이런 상황이었어요. 회사는 정리해고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랐어요. 서로가 적이 되고 전쟁이 벌어졌어요. 방송, 욕설, 폭력…. 우린 저들과 색깔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데,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데 울분이 차올라요. ‘시체 팔이’란 말을 못 참겠어요. 참을수록, 화가 쌓여요. 욕이라도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겠죠. 그런데 지부에서 대응하지 말라고 부탁하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어요. 고문당하는 느낌이에요. 주중이 형도 이런 상태였을까요. 괴롭다 못해 도망친 건 아닐까요.”
#4. 대한문 분향소, 모욕의 시간
2018년 7월 3일, 쌍용차지부가 대한문 앞 분향소를 설치한 날.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국본, 보수단체)의 군가 방송과 북소리, 욕설이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오전 11시 30분 기자회견을 마치고 분향소를 설치하자마자 보수단체의 공격이 시작됐다. 경찰은 분향소를 포위했다. 보수단체는 경찰 뒤를 둘러쌌다. 분향소는 겹겹이 포위됐고, 분향객들은 고립됐다.
“오줌을 싸도 거기서 싸고, 똥을 싸도 거기서 싸라. 배들 한 번 쫄쫄 굶어봐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기어들어가!” 오후 6시경, 금속노조 조합원 십여 명이 분향소를 찾아 영정을 향해 절을 올렸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그들을 향해 “만화 그림(고인의 영정) 안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지랄하고 자빠졌네, 으하하하”라며 노래를 불렀다. 듣다 못한 시민이 이어플러그 수십 개를 사 왔다. 분향소 지킴이들은 이어플러그를 귀에 꽂았다. 보수단체는 이곳 대한문이 ‘태극기 성지’라며 분향소를 철거하겠다고 했다. 보수단체 천막 두 동을 분향소 쪽으로 밀어붙였다. 분향객들이 천막 기둥을 부여잡고 이들을 막아섰다. “네 애비가 죽었냐”, “여자들도 있네. 너넨 몸 팔아도 괜찮지”, “우리가 폭행했다고 경찰에 말한 년 잡히면 똥구멍을 찢어발길 거야.” 보수단체들은 상상하기 힘든 욕설을 퍼부었다. 분향객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천막만 지켰다.
고립은 밤까지 이어졌다. 분향소 안 사람들은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었다. 화장실을 가지 못해서다. 경찰과 보수단체 때문에 강제단식을 하게 된 셈이었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분향소 앞에서 등목을 했다. 물이 흥건하게 분향소 바닥을 적셨다. 침을 뱉은 커피를 뿌리기도 했다. 의자를 집어 던지거나, 태극기와 성조기로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 분향소에 있던 시민과 변호사, 취재기자가 그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들은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고, 머리채를 잡고, 카메라를 부수고 훔쳤다. 밤 9시경 윤충렬 수석부지부장이 밖에서 김밥을 사 왔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김밥을 빼앗아 엎었다. 시청 앞 도로에 김밥이 나뒹굴었다.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윤 수석부지부장과 보수단체 회원 간에 한바탕 싸움이 일었다.
짧은 싸움 끝에 긴 설득의 시간이 이어졌다. 분향객과 지킴이들은 곳곳에서 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김득중 지부장은 난입한 보수단체 회원에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주희, 오민애 변호사는 철거를 위협하는 보수단체 여성 회원에게,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에게 분향소 설치 이유를 설명했다. 윤충렬 수석부지부장은 보수단체 방송차의 마이크를 잡고 호소했다.
“저희는 여러분을 쫓아내려고 온 게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를 말씀드리고 싶어서 마이크 잡았습니다. 우리는 2009년에 ‘빨갱이’로 낙인찍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딜 가도 취직이 안 됩니다. 그사이에 동료들이 죽어갔습니다. 2012년에 22번째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하려고 대한문에 분향소를 차렸습니다. 많은 시민이 분향하고, 정치인들도 이 곳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회사가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를 복직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근데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료가 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번이 30번째입니다. 투잡을 뛰면서 어떻게든 가족을 챙기려고 발버둥 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시민들 분향할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호소는 욕설로 돌아왔다. “죽은 데 가서 해”, “세월호 리본 떼고 말해”, “분향소 차릴 거면 대형 태극기 두 개 달아!” 윤 수석에게 얘기나 들어보자며 마이크를 쥐여줬던 보수단체 한 회원에게까지 욕설이 날아들었다. “쟤네들하고 무슨 협상이냐. 당장 꺼지라고 해!” 보수단체 회원끼리 말다툼이 났다. 윤 수석은 손사래를 치며 뒤돌아섰다.
이날 충돌은 다음 날 해가 뜨고 나서야 소강에 이르렀다. 김득중 지부장이 감싸 안아 지켰던 고인의 영정도 제자리에 놓였다. 하지만 위협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경찰 폭력 진압의 여름을 지나온 쌍용차 노동자들은, 9년이 지난 현재 대한문 앞에서 또다시 모욕의 여름을 맞고 있다.
7개월 전, 쌍용차지부가 인도 원정 투쟁을 떠났을 때 쌍용차 대주주 마힌드라그룹 회장은 “한국 경영진이 해고자 복직 문제를 잘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7월 10일에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그는 또 다시 “현장에 있는 경영진이 문제를 잘 풀어나갈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지난 7개월간 회사는 복직 여건이 마련됐음에도 복직 시한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30번째 죽음이 발생했다. 120명의 쌍용차 해고자들은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어딘가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