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회사 임원인 김OO 상무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6일 뒤인 28일. 보수언론과 일간지 등은 일제히 ‘유성기업 폭력사건’을 앞 다퉈 보도했다. 이들은 유성기업 노조를 비롯해 민주노총 전체를 ‘폭력 집단’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최근 노동계와 사이가 틀어진 정부 및 여당도 총 공격에 나섰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런 일이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행정안전부와 경찰청은 각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부겸 행안부 장관은 “국민 안전을 제대로 보호 하지 못해 국민과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 틈을 타, 경찰은 벼르고 별렸던 ‘공권력 강화’를 시사하고 나섰고, 자유한국당은 ‘민주노총 고발센터’라는 우스꽝스러운 사업 계획까지 발표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유성기업 공장 앞에서 회사를 질타하던 정치인들은 더 이상 없다. 노동자들에게 왜, 라고 묻는 언론도 없다. 이들은 회사 임원이 전치 5주의 부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지난 8년간 이어져온 모든 폭력을 지워버렸다. 수직적 폭력은 당연시되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은 죄악이 되는 사회. 이 곳에서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22일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유성기업 노동자의 이야기다.
#1. 11월 28일
11월 28일 그 날 이후, 신문을 끊었습니다. 누군가 SNS에 올린 기사들도 애써 외면했고요. 처음에는 그저 기가 막혔습니다. 우리를 사람 죽인 범죄자처럼 묘사해 놓았으니까요. 그리고는 곧 슬픔이 밀려왔어요. 지난날들이, 고통들이 모두 지워져버린 것만 같았거든요. 마치 없었던 일처럼. 마지막으로는 가장 참기 힘든 감정이 몰아쳤습니다. 죄책감과 미안함이요. 다른 감정은 왔다가도 금방 사라지지만, 이건 꽤 질기게 들러붙어 있었어요. 그때 나는 주눅 든 죄인 같았습니다.
누가 어떤 기사를 쓰든, 어떤 욕을 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조합원들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거. 그게 미치겠는 겁니다. 너무 미안해서요. 50일 가까이 임금도 못 받고 싸웠던 그 사람들한테 누를 끼친 것 같아서요. 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으면서까지 지켜왔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노조 사무실에 안 나갔습니다. 잠에서 깨면 자꾸 그 생각이 나니까, 하루 종일 잠들었다 깨고, 또 잠들고.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이 돼서야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한참을 그냥 걸었어요. 걷다가 담배 피우고. 또 걷다가 담배 피우고. 그제야 받아들이자, 라는 마음이 들더군요.
다음 날, 노조 사무실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한참을 미안해했습니다. 이 투쟁 때문에 내 소중한 동료들이 구속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미안함. 그리고 나 때문에 우리가 오래 지켜왔던 이 싸움이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는 죄책감이 뒤엉켰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서로에 대한 부채를 확인하는 과정은 너무 힘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위로가 됐어요.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있잖아, 차라리 잘 했어, 너니까 그 정도지 내가 거기 있었으면 죽였을지도 몰라, 그 때 너와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많이 고민해서 던졌을 그 무심해 보이는 말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2. 11월 22일
사건이 일어난 날. 우리는 평소처럼 집회를 끝낸 뒤 회사 본관에 남아 있었습니다. 조합원들이 돌아간 뒤, 간부만 남아서 본관에 머무르는 것은 의례적인 행위였어요. 우리를 피하는 회사 임원들 얼굴 한 번 보겠다는 의미죠. 우리는 그날 김OO 상무와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거의 회사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조합원들이 ‘김OO 씨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라는 피켓까지 만들었겠습니까. 그를 향한 조합원들의 분노는 상당했습니다. 그가 유성기업에 온 후, 현장은 완전히 엉망이 돼 버렸으니까요.
간부들은 여느 때처럼 한 시간만 기다리다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간부들이 고생하는 게 안타까워 저도 함께 있겠다고 했고요. 날이 춥기도 해서, 본관 안에 들어가 있기로 했어요. 거기서 김OO 얼굴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날 어용노조와 회사가 교섭을 하는 날이었답니다. 그 전 주에도, 우리가 다 돌아가면 회사와 어용노조가 모여서 교섭을 열었다고 했어요. 늘 회사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우리와 어용노조를 철저하게 차별했어요. 우리가 교섭 좀 열자고 서울 사무소까지 쫓아 올라가도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회사가 우리와 만나줬더라면, 우리의 얘기를 좀 들어줬더라면, 김OO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렇게까지 감정이 북받쳤을까요.
김OO는 우리를 보고 도망갔습니다. 모든 게 다 엉망이 되고 피폐해진 사람들 앞에서 그는 또 도망쳤습니다. 그저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도망이라니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김OO를 쫓기 시작했어요. 대표실 앞에 도착했을 때, 당연히 문이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돌렸는데, 이상하게도 문이 철컥, 하며 열리더군요. 그리고 눈앞에 김OO가 나타났습니다. 마치 세상에 나와 김OO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주변이 새까매졌어요. 나는 김OO를 향해 야,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순간, 이번에는 모든 것이 새하얘졌습니다. 거센 파도 같은 사람의 무리가 순식간에 내 뒤를 덮치고 지나갔어요. 모든 것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그 찰나의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보수언론은 40분 간우리가 김OO를 구타했다고 보도했지요. 노조는 1~2분이라고 했습니다. 둘 다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20초, 아니 10초 정도였을까요. 폭력이 일어난 것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누가 조합원인지, 누가 관리자 인지, 그리고 어떤 이들이 뒤엉켰는지 분간할 수도 없을 만큼의 시간이었습니다. 단 1분이었더라도 나는 기억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때의 기억이라고는 소란한 소리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뒤에서 그만! 이라고 외치는 고함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고, 김OO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제야 그 자리에 김OO 상무와, 최철규 대표 등 회사 관리자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그 긴 시간 폭행이 이뤄졌다면, 회사 관리자들은 왜 폭행을 말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김OO를 감금했다고요. 감금하고 폭행했다고요. 우리가 문을 막은 것은, 사건 직후였습니다. 조합원들이 들어올까 봐 그랬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조합원들이 그 곳으로 밀고 들어오면 정말 사고가 날 것 같아서 문을 막은 겁니다. 그 정도로 김OO 상무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습니다. 정말 단 1분간이라도 폭행이 이뤄졌다면, 김OO는 멀쩡히 걸어 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사건 후에는 관리자들을 향한 성토와 한탄이 이어졌습니다. 우리와도 교섭해 달라, 대화해 달라고요. 우리가 지금껏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얼마나 서러웠던지, 우리 부지회장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체면 구기게 왜 울고 있느냐고, 제가 괜히 면박을 주기도 했습니다. 20분, 30분 동안 우리는 계속 묵히고 쌓아놨던 한탄들을 터뜨렸습니다. 살아왔던 인생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보수언론은 우리가 계획적인 폭력을 저지른 뒤, 증거 인멸 까지 했다더군요. 저는 ‘증거 인멸’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청소를 했지요. 그 와중에 또 주변을 챙기는 사람이 꼭 있지 않습니까. 한 형님은 김OO 피를 닦아 주다가 휴지까지 손에 쥐어줬어요. 또 한 사람은 밖에서 생수통을 챙겨와 사람들한테 물을 나눠 줬고요. 종이컵에 물을 따르다가 넘쳐흘러 바닥을 닦았지요. 상황이 모두 종료된 후에도 그 사람들은 책상 정리까지 하고 나왔어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예요. 평소에 우리가 아무렇게나 종이컵을 놔두고 가 버리면, 성질을 내는 사람들이요. 그 때 우리는 모두 맨얼굴이었습니다. 그 흔한 마스크 하나 쓰지 않았어요. 맨얼굴로 계획적인 폭력을 저지르고 증거 인멸을 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3. 정리 잘 하는 숙련공 형님
말이 나왔으니, 정리 정돈에 도가 튼 우리 형님들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정리를 하고 나왔으니 지독한 사람들이지요. 그 형님들은 이삼십 년 이곳에서 일을 한 기술자들입니다. 유성기업은 피스톤링이라는 자동차 엔진 부품을 만드는 곳이에요. 핵심 부품이지요. 그런데 회사는 진즉부터 설비에 예산 투자를 하지 않았어요. 기계도 늙으면 느슨해지는 법이지요. 피스톤링은 정교하게 찍어내야 하는데, 기계가 오래 돼 센터를 잘 맞추지 못해요. 형님들은 껌 종이를 기계에 끼워 넣고 작업을 하곤 했습니다. 진짜 숙련공이 아니면 불가능한 작업이지요. 그래서 예전에는 관리자들도 형님들을 기장님, 반장님, 이렇게 불렀습니다. 기술자 대우를 해 준거죠.
2011년에 회사가 직장폐쇄를 했습니다. 그 때 회사는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공장에 들여보냈죠. 당시 짬밥 있던 숙련공 형들이 다 우리 노조였습니다. 그 형님들이 없으니 일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관리자들이 형님들한테 ‘들어와서 센터만 맞춰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 형님들은 또 그 부탁을 들어주러 공장엘 들어갔다가 나와요. 처음에는 그 형님들이 참 미웠습니다. 아니, 회사가 저런 식으로 나오는데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으냐고 따져 물었어요. 형님들이 그러대요. 기계가 무슨 죄냐고. 기계는 자기 삶이라고. 그 정도로 기계와 회사에 애착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형님들은 ‘투쟁하는 것 좋다. 다만 현장 투쟁은 안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현장에 있으면 자꾸 불량이 나오는 걸 봐야 하는데, 그걸 못 보겠답니다. 차라리 밖에서 투쟁하는 게 마음 편하다고.
저도 그 형님들 밑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그냥 기계를 슥 봐도, 뭐가 잘못됐는지 잡아내는 사람들이었어요. 청소도 엄청 했습니다. 저녁 5시 반이 되면, 기계를 끄고 청소를 깔끔하게 시켰어요. 바닥에 묻은 기름까지 깔끔하게 닦아야 청소가 끝납니다. 다음 조가 들어오면 깜짝 놀라죠. 마치 작업을 안 한 것 같다며. 그 형님들에게 기계는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분신이 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노조 탄압을 한답시고 형님들에게 형광등을 닦게 하고, 야, 이거 안 해? 이 기계는 네 것이 아닌 회사 거야, 시키는 대로 해, 라며 자존심을 뭉갰습니다. 이제는 형님들도 변해갑니다. 관리자가 청소를 시켜도 ‘내가 청소하러 왔느냐, 생산만 하겠다’며 거부합니다. 더 이상 내 기계가 아니니까,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니까요. 십 수 년을 기계에 매달려 살아왔던 그 형님들의 상실감을 내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4. 강성하지 않아도
저는 2004년에 유성기업에 입사했습니다. 그 때가 30대 초반이었을 겁니다. 주위 사람들 말로는 유성기업노조가 강성이라대요. 그런데 저는 잘 몰랐습니다. 노조든 뭐든. 저는 고등학교 때 까지 운동을 했습니다. 아, 그 운동이 아니라 축구요.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시고, 어머니가 막노동을 하시며 우리 남매 넷을 키웠어요. 매일 간장에 밥을 비벼 먹었는데, 그 조차 귀하던 시절이었죠. 어머니는 제가 너무 밥을 잘 먹어서 걱정이었답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파했으니까요. 쌀 살 돈도 없는데, 학교 육성회비 낼 돈이 있었겠습니까. 매일 교무실에 불려가 육성회비 왜 안내냐, 어머니 모시고 와라, 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다 축구부 들어오면 육성회비를 안 내도 된다는 축구부 선생님 말을 듣고, 덜컥 가입해버렸지요. 고등학교도 축구 특기생 장학금으로 다녔습니다. 축구 대회에서 준우승도 해서,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렸고요. 그래도 가장 좋았던 건, 합숙을 하면서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생 때 신림동에 살았는데, 매일 서울대생들이 시위를 했어요. 그 때 저는 혀를 끌끌 차곤 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불만이면, 공부 열심히 해서 정치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때만 해도 참 자신만만했지요. 하지만 아버지 없는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 운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대학진학에 실패했고, 그러면서 선수 생활도 끝이 나 버렸지요. 그 후로는 돈이 가장 중요해 졌습니다. 적어도 아버지처럼은 살지 말자, 라는 마음으로 이런 저런 직장을 다니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유성기업에 입사했을 때, 저는 노조에서 굉장한 뺀질이였습니다. 집회도 잘 안 나갔어요. 왜 유성기업노조가 강성이 됐는지 선배들이 설명해 줘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잔업 빠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고, 관리자에게 조인트를 까이거나 따귀를 맞고, 관리직과 생산직은 섞여서 밥도 먹을 수 없고, 심지어 유니폼 질조차 천지차이였던 그 시절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저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밑천 위에서 누려온 거지요.
2011년,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을 앞두고 노조와 회사가 교섭을 했습니다. 저도 그 때 나름 욕심이 있었어요. 상시 주간조로 배정 받아 취미 생활도 하고 여유도 부려보고 싶다는. 원래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는데, 회사가 이를 지키지 않았어요. 노사 교섭이 잘 안 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뭐, 언젠가는 되겠지 했습니다. 원래 노사 교섭이라는 게 결렬됐다가도 갑자기 합의되고 그런 거니까요. 그러다 노조가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고, 2시간 파업에 돌입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도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 해 5월 18일. 우리는 2시간 파업을 한 뒤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직장폐쇄가 됐다는 연락이 왔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공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용역들 몇 명이 출입을 막고 있었어요. 왜 직장폐쇄를 했느냐 물으니, 우리가 파업을 해서랍니다. 옆에서 법을 꽤 아는 조합원이 이건 불법이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불법이란다. 너넨 이제 죽었다’라며 의기양양하게 공장으로 들어갔지요. 그 때는 몰랐습니다. 그것이 지옥 같은 8년의 시작이 될 줄은, 그리고 내가 이렇게 8년을 노조에서 싸우게 될 줄은요.
#5. 비현실적인 그날 밤보다 더 비현실적인
직장폐쇄가 된 날. 간단한 집회가 끝난 뒤였으니 밤 12시쯤이었을까요. 조합원들과 공장 주변을 살피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공장 한 바퀴를 쭉 한번 둘러보려고요. 제가 앞장서서 컴컴한 길을 한참 걸어가는데, 저 앞에서 검은색 차량이 상향등을 깜박이고 클랙슨을 울리면서 막 달려오는 겁니다. 우리는 당연히 피했지요. 그리고는 다시 걸었습니다. 잠깐 있다가 또 한 번 검은색 차가 클랙슨을 울리면서 달려왔습니다. 피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렇게 세게 달려오는데. 그리고는 잠시 뒤에 저 쪽에서 또 뭔가가 다가오는 겁니다. 차량 같긴 한데, 전조등도 켜지 않고 클랙슨도 울리지 않아서인지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이 달려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저는 분명 그 차를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백미러가 팔꿈치를 세게 치고 지나갔습니다. 순간 불이 번쩍해, 팔꿈치를 감싸고 주저앉았지요. 그리고 그 순간, 제 뒤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두둑, 소리 같기도 하고, 퍽,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 악, 소리를 지른 것도 같았습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고개를 슬쩍 돌려 뒤를 봤어요. 사람들이, 그것도 무더기로, 차에 받히고 있는 장면을 그 때 처음 봤습니다. 차량 밑에서 형님 한 분이 끌려가고 있었고요. 차량은 잠깐 멈칫 하더니 그냥 돌진해 사라졌습니다. 아수라장이었어요.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렸지요. 저는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서요.
머리를 다친 사람, 다리가 부러진 사람, 얼굴이 완전히 작살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며칠 뒤에 그 운전자가 자수했는데, 유성기업이 고용한 용역이었답니다. 차량은 버려져 있었는데 대포차였대요. 가해자는 무면허고요. 무면허 운전자가 대포차를 가지고 인도로 돌진해 13명을 치고 달아났는데, 죄명은 단순 도로교통법 위반이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경찰조사였습니다. 교통사고 피해자로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에 갔어요. 저는 제가 입은 피해 사실만 조사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왜 밖으로 나갔느냐, 그 날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누구냐, 길을 가는 도중에 무슨 일 있었느냐, 이런 것만 물었습니다. 저는 처음 경찰 조사를 받는 것이어서 얼떨떨했었죠. 뭐 쟁의부장이 잡았겠죠,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지회장과 쟁의부장이 구속이 됐어요. 제가 재판에서 증인으로 서게 됐는데, 갑자기 제가 경찰조사 받았던 조서가 스크린에 나타나는 겁니다. 쟁의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선동했다고 네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며. 그 순간만 생각하면, 정말 억장이 무너집니다. 가슴이 찢어지고 등골이 쭈뼛 섰어요. 쟁의부장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재판부에게 경찰이 유도심문을 한 거라고, 나는 그냥 교통사고 조사를 받으러 간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때였을 겁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사회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무참히 깨져버린 것이요.
#6.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선, 괜찮아 불안해하지 마
제가 밥을 두 공기씩 먹어가며 축구를 해서 그런지 몸이 좋습니다. 덩치는 좋은데, 보기와는 달리 겁이 조금 많아요. 그해 5월 24일 경찰 공권력이 공장에 투입된 날, 저는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과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새까맣게 무장한 경찰들이 쫙 깔려 있는데, 와 진짜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슬그머니 옆 동료 팔짱을 빼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곧 모두 연행한다고 하니까, 화장실에 천천히 다녀오면 모든 게 정리될 줄 알았죠. 그런데 화장실에 갔다 와도 그대로예요. 심지어 제 자리를 그대로 남겨 놨더라고요. 어쩔 도리 있나요. 다시 쭈뼛거리며 자리로 돌아갔죠. 그 날 조합원들이 모두 경찰에 연행돼 쫓겨 나왔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른 채로요.
그리고는 공장 밖에 있는 비닐하우스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공장엘 들여보내주지 않으니까요. 그 당시 집안 사정이 많이 좋지 않았습니다. 돈이 급하게 필요하던 시기였어요. 당연히 이런 저런 고민이 들었지요. 아내에게 ‘빨리 끝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딱 1년만 버텨 보겠다’고 했어요. 참 고맙게도 아내는, 다 괜찮으니 쪽팔리는 짓 하지 말자고 하대요. 그 더운 날, 비닐하우스와 공장 앞 다리 밑을 오가며 싸웠습니다. 그리고 6월 22일 아침 7시 쯤. 비닐하우스에서 밥을 먹는데 공장 앞에서 비상이 걸렸답니다. 숟가락 던지고 뛰어갔지요. 갑자기 공장 앞에서 컨테이너가 열리며 용역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허겁지겁 뛰어오느라 우리는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도 왜인지, 제가 제일 앞에 있더군요.
순식간에 용역들과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에 불이 번쩍 하는 겁니다. 곧 시멘트 바닥에 뭔가 텅텅 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요. 관자놀이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는 것 같아 손을 대보니 피였습니다. 멍하니 있는데, 뒤에 있던 동료 누군가가 제 목덜미를 움켜잡고 밖으로 끌어냈어요. 소화기통에 맞았다는 겁니다. 그제야 앞쪽을 보니,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용역들이 던진 소화기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 소화기를 뿌려대는 통에 하얀 가루가 휘날리는데, 그 사이로 용역들이 기억자로 된 쇠붙이 같은 것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구급차에 타려는데, 구급대원이 다른 사람부터 태우겠다며 저를 막았습니다. 얼굴이 함몰된 채 쓰러진 사람들이 먼저 실려 갔어요. 구급차가 계속 들어왔고, 저는 계속 뒤로 밀렸습니다. 너무 부상자가 많았어요. 정말 끔찍하게 다친 사람들이요.
병원에 도착해 머리를 일곱 바늘 꿰맸습니다. 그 동안에도 사람들은 계속 실려 왔어요. 마취 주사가 너무 아프기도 하고, 왠지 서럽기도 해서 병원 침대에 누워 눈물을 찔끔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엉망이 된 친구 하나가 내 침대를 붙잡고, 괜찮아, OO아 괜찮을 거야, 그러는 겁니다. 제가 불안해서 울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어요. 자기 얼굴은 더 만신창이가 돼 가지고는 계속 나한테 괜찮다고, 울지 말라고. 그 친구는 저와 달리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던 친구였습니다. 대포차에 치었을 때, 그 친구는 다리가 부러졌었지요. 그 다친 다리를 가지고 또 현장에 왔다가, 이번엔 광대뼈가 부서진 겁니다. 심지어 그 친구는 영동공장엘 다녔어요. 굳이 여기까지 와서 맞고 다칠 이유가 없었지요. 그 때 그 장면이 떠오르면 너무 슬퍼집니다. 그 친구가 저를 위로하던 장면도, 그 친구의 퉁퉁 부운 얼굴도요. 친구는 그 얼굴을 하고서도 다시 그 아수라장으로 가겠다고 하더군요. 저보다 더 많이 다친 사람들도 부상 부위를 수습하고는 현장으로 뛰어갔습니다. 다시 돌아간 현장에서, 저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다친 사람들에게, 형님과 동생들에게, 용역들은 여전히 소화기를 분사하고 물을 뿌려대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사람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무서운 살의가 가득 차올랐습니다.
#7. 너와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요. 왜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 난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변함없습니다. 직장폐쇄 전까지, 아니 직장폐쇄 이후로도 우리는 관리자들과 꽤 허물없이 지냈습니다. 작업을 하다가 불량이 나오면, 회사 임원의 눈에 띄지 않게 공장 뒤편에서 만나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얘기했어요. 옛날에는 관리자들도 ‘우리도 금속노조 조합원’이라고 웃곤 했습니다. 다들 회사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김OO가 오고 나서 현장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관리자들에게 성과급제를 도입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노조와 친하게 지내면 성과급이 깎이거나 다른 곳으로 전출이 됐어요. 관리자들의 태도는 무섭게 돌변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회사는 노조를 깨기 위한 작업들을 했지요. 경고장을 남발하고, 간부들을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죠. 김OO 상무가 오고 나서는 개별 조합원들을 상대로 엄청난 고소고발이 이뤄졌습니다. 관리자들이 친하게 지내던 조합원들을 고소고발토록 하는 분리 작업도 이어졌어요.
친하게 지냈던 관리자가 있었습니다. 퇴근할 때 같이 청소하고, 음료수를 나눠 마시기도 하는. 제가 재판을 받으러 간 날, 그 친구가 회사 측 증인으로 나왔더라고요. 사측 편에선 그는 저에 대해 이런 저런 위증을 늘어놓았어요. 부아가 치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냥 그 정도였다면, 그 친구도 먹고 살기 힘드니까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라며 욕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데 판사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처벌받기를 원하느냐고요. 그 사람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처벌받기를 원한다고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눈이 뒤집혔습니다. 사람 관계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구나, 내 존재는 겨우 이 정도구나, 하는 배신감과 모멸감이 불 같이 달아올랐어요. 참지 못하고 법정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 사람이 위증을 저지르고 있다고요. 법원 경비들이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어요. 한동안 굉장한 우울감에 시달렸고, 지금도 그 친구의 얼굴을 보기가 힘이 듭니다.
관리자들은 조합원 개개인을 상대로 고소고발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고소고발 한 관리자들은, 정작 그 사실을 알지 못해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전에 그나마 조합원들이 좋아했던 관리자가 있었어요. 김OO 상무가 온 후, 그는 다른 곳으로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고소했고, 손해배상까지 청구했대요. 하루는 그가 오랜만에 우리 공장에 들어와 점심을 먹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식당으로 쫓아갔죠. 그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어떻게 손해배상까지 청구할 수 있느냐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다시 따져 물었습니다. 도대체 왜 나를 고소했느냐고.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은 언제나 차고 넘쳤습니다.
#8. 땅바닥에 물감을 묻힌 죄, 징역 1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가 그렇게 치졸하게 나올 줄은요. 김OO 상무는 2014년 10월 경 유성기업에 들어왔습니다. 그 즈음, 저는 몸을 조금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김OO가 쌀을 사들고 병문안을 왔었습니다. 노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요.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사적인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원래 노무 담당 임원을 밀어내고 실권을 잡았습니다. 회사의 노조파괴 업무를 맡게 된 것이었죠. 그를 다시 만난 건 식당에서였습니다. 그가 대뜸 자신에 대한 고소를 취하해 달라더군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요. 그 말을 들은 김OO는 ‘이제 나는 나쁜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더군요.
그 말이 시작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급변했지요. 회사 관리자들을 모두 노조 농성장 앞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붙여 놓은 플래카드와 현수막을 모조리 떼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막으면 일제히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채증과 고소고발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거죠. 관리자들에게 채증은 곧 성과와 같았습니다. 조합원들에 대한 채증과 고소고발은 그들의 성과로 적립이 됐어요. 그 때부터 고소고발 폭탄이 터졌습니다. 김OO 상무가 온 뒤, 무려 1300건의 고소고발이 이뤄졌으니 말 다했죠. 그들의 방식은 너무나 치졸했습니다. 언젠가는 조합원들이 천에 아크릴 물감으로 글씨를 써 현수막을 만들었어요. 회사는 물감이 땅에 묻었다며 시설관리물 훼손으로 조합원들을 고소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검찰이 이 사건으로 우리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는 겁니다.
기가 막히지요? 이런 사건들 많습니다. 검사과라고, 대부분 여성들이 일을 하는 사무실이 있습니다. 회사가 입구 3개에 모두 CCTV를 달아놨어요. 여름에 얇은 티셔츠 하나 입고 다니는데, 위에서 CCTV로 찍고 있으니 얼마나 싫겠어요. 여성 조합원들이 노조에 건의를 했습니다. CCTV를 없앴으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어디 회사가 순순히 없애 주나요? 할 수 없이 나를 포함한 간부 3명이 가서 CCTV를 테이프로 가렸습니다. 회사는 시설관리물을 훼손했다며 또 우리를 고소했지요. 검찰이 어떻게 구형을 했는지 아십니까? 테이프를 직접 붙인 사람은 징역 1년 6개월, 옆에서 테이프를 뜯은 사람은 징역 1년, 그리고 나는 징역 6개월. 왜 제가 징역 6개월이었느냐 하면, 저도 테이프를 같이 뜯긴 했는데 옆에 사람보다 적게 뜯었대요. 이게 말입니까 막걸리입니까. 온갖 노조파괴 범죄를 저지른 유시 회장이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노조파괴 보다 CCTV에 테이프 붙이는 것이 더 중한 범죄인줄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담배를 피우면서 관리자에게 항의했다고 벌금 200만 원 유죄가 선고됐습니다. 그냥 항의하면 폭력과 감금으로 고소당합니다. 조합원 한 명당 30~40건의 고소는 기본 입니다. 경찰 조사 받고 재판 받는 것이 일상이 돼 버렸어요. 차를 대절해 재판을 받으러 가기도 합니다. 노조 사무실 일정표가 재판 일정으로 새까매졌고, 한 달 중 보름은 법원을 들락거립니다. 관리자와 어용노조 사람들은 고소 고발을 위해 조합원들을 계속 도발합니다. 형, 동생 하던 친구들이 욕을 하며 지나가요. 그걸 참지 못하고 움찔, 하면 바로 카메라로 채증을 해 갑니다. 관리자들은 시비조, 몸빵조, 채증조로 나뉘어 성과를 올렸고요. 가장 열 받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기획한 김OO 상무는 항상 고소고발인 명단에 빠져 있었다는 겁니다. HR총괄 임원이라는데, 회사 조직표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아요. 창조컨설팅처럼, 뒤에서 조용하게, 사람들을 앞세워서 노조를 탄압하는 거죠. 그 비겁함이 너무 화가 납니다.
# 9. 광호야, 아 너구나
시작은 치졸했지요. 그렇지만 결국 그것들이 모이고 커져서 우리를 갉아먹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어요. 저 조차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정말 나쁜 아빠가 돼 버렸어요. 저는 아이 셋을 키우는 아빠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과, 아직 어린 막내딸이 있어요. 아들 둘이 곧잘 싸웁니다. 원래 형제끼리 다들 싸우면서 크는 거잖습니까. 그런데 가끔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하는 말과 행동들, 그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모습들을 보면 숨이 턱 막힙니다. 아이의 말과 행동에서 회사 관리자들의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아직 어리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딱 그 순간을 맞닥뜨리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요. 마치 관리자에게 화를 내듯, 저항을 하듯, 내 아이한테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 내 아이가 관리자로 보인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미칠 만큼 속이 상해서 운 적이 많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조합원들도 많았습니다. 정말 이러다가 사람 죽어나갈 것 같았어요. 그래서 회사에 공문을 보냈지요. 지금 당장 조합원들 심리치료가 필요하다고요. 회사는 심리치료의 필요성은 동의한다면서도, 추후에 진행하자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지회장이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고요. 영동공장에서. 결국에는 올 게 왔구나, 결국 열사가 나왔구나,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조합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한광호, 라는 그 익숙한 이름도, 얼굴도, 그 때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장례식장에서 광호의 영정사진을 보고, 아, 너구나. 그 여름 투쟁 때, 내 뒤에 다가와 ‘형, 힘드시죠’ 라며 어깨를 주물러주던 광호구나, 왜 하필 너냐, 왜 네가 죽은 거냐, 오열을 하는 내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들었습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그럼에도 보이지 않게 사람들을 챙기곤 했던 광호가 열사가 됐습니다. 저를 형이 라고 부르던, 그 동생이 이제는 한광호 열사가 된 겁니다.
그 때부터 한동안 출근 복장을 한 채 잠을 잤습니다. 전화기를 손에 쥐고서요. 새벽에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바로 뛰어나가야 하니까요. 새벽에 형 힘들어, 보고 싶어, 이런 전화가 오면 집에서 뛰쳐나갔습니다. 그래 내가 데리러 갈게, 택시도 타지 마,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바래다줄게, 라면서요. 죽음이, 이 우울감이 퍼질까봐 두려웠습니다.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넘어,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절실했습니다. 누군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가슴이 덜컥거렸습니다. 정말 강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믿어왔던 형님이 수면제를 삼켰을 때. 헐레벌떡 응급실에 달려갔을 때. 그 형님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화가 치어 올라 담배만 연거푸 피워댔을 때. 나는 그 울분을 삼키고 또 삼켰습니다. 나와 내 동료들이 서로의 안위를 감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고통인지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10. 나는 너를 버리지 못하겠어
종종 혼자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으로 1인 시위를 갑니다. 거기 가면 광호의 영정사진이 있어요. 사진 속에서 광호는 웃고 있지요. 그 사진에 대고 가끔 말을 겁니다. 야, 너 왜 웃냐. 그러다 보면 광호가 너무 미워져요. 그 때부터 욕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 쌍놈의 새끼, 왜 죽었냐, 형은 절대 안 죽을 거야. 다 싸우고 죽을 거야. 살인자 취급을 받더라도 안 죽을 거야.
저는 지금 살인 미수를 저지른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회사 임원에게 전치 5주의 부상을 입힌 살인자라고 합니다. 강성노조이자 조폭노조, 국민의 안전을 위협 하는 테러분자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부터 죽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죽을 만큼 맞고, 밟히고, 그러다 살아 돌아오고, 또 죽을 만큼 맞고 밟히고. 민주노조 사수요? 주간연속2교대제요? 이제는 그저 여유로운 소리일 뿐입니다. 저는 이제 그런 것까지 생각 못하겠습니다. 지금은 민주고 노조고 나발이고, 그저 나는 내 옆에 있는 너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내 옆에 있는 네가 짓밟히고 죽지 않도록, 그저 너와 내가 서로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입니다.
* 이 기사는 22일 사건 현장에 있던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조합원 인터뷰를 재구성한입니다.
현재 경찰은 김OO 상무 부상 사건을 빌미로, 유성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표적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사건 일주일 만에 특별합동감사팀을 설치했고, 3일 뒤 해당 노동자들에 대한 소환장 발부 및 출국금지 명령을 내렸다. 경찰 조사를 받은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담당 경찰관들은 ‘계획된 범죄다’, ‘누가 시켰느냐’, ‘이번에 구속 못 시키면 내가 옷을 벗겠다’는 등 강압적인 태도로 진술을 요구했다. 법원은 12월 24일 조합원 4명을 상대로 영장청구 실질심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반면 유성기업 유시영 회장을 비롯한 회사 임원들에 대한 범죄수사는 두 달이 돼 가도록 지지부진한 상태다. 유성기업지회는 지난 11월 1일, 회사 임원들을 업무상 배임·횡령으로 고소했지만 현재까지 유 회장의 소환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찰은 지난 12월 19일. 핵심인물을 제외한 사측 인사 4명을 상대로만 조사를 진행했다. 충남경찰청 관계자는 《워커스》와의 통화에서 편파수사 논란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 똑같이 진행 중이다”라고 답했다.
한편 지난 12월 13일 충남노동인권센터가 발표한 ‘유성기업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유성기업 노동자 53.4%가 주요 우울 고위험군에 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 평균 주요 우울 고위험군 비율은 약 5% 정도다. 일반인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사회심리 스트레스 고위험군도 86.2%에 달했다. 2012년 50.7%보다 35.5%p가 증가한 셈이다.
유성기업 노동자 255명 중 5명(2%)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20명(7.8%)은 구체적으로 자살을 계획했고, 62명(24.3%)은 자살을 생각해봤다고 답했다. 2012년부터 유성기업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진행해 온 충남노동인권센터는 “2017년 결과는 충격적인 수준”이라며 “전체 직원이 500명 내외인 기업에서 정신건강 고위험군이 비정상적으로 많다.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과 조건, 반복적인 탄압이 중단되지 않는 한 상태는 급격히 악화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