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홍진훤]
성지훈 기자
경비도 친절한 삼성병원 잠입기
헬hell조선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마치 지옥 같다는 자조겠지만 사실 이 나라는 엄밀히 말해 지옥이 아니다. 지옥은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고 죗값을 치르고 회개하는 곳이다. 잘못을 저지를수록 부와 권력을 쌓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더욱 힘겨워지는 이곳은 그래서 지옥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인과율이 무너진 세상, 상식과 도덕의 기준 자체가 뒤틀리고 미쳐 버린 세상. 여기는 ‘헬조선’보다 ‘매드mad 코리아’에 가깝다.
워커스는 이 미친 나라를 탐구해 보려 한다. 얼마나 미쳤는지, 어디가 돌아 버렸는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라 했던가, 아니면 미친 X 눈엔 미친 X만 보인다 했던가. 어쨌든 옛 성현들의 말씀을 따라 워커스의 기자들도 미쳐 보기로 했다. 매드 코리아의 미친 기자들 이야기.
이번엔 너로 정했다
삼성 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지 2년이다. 그동안 이승엽의 홈런 소식에 눈을 떴다는 둥 증세가 호전돼 임원진의 업무 보고를 받고 있다는 둥 이 회장의 건재를 알리고 싶은 삼성 측의 많은 노력에도 이 회장의 사망설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회장은 올해 74세의 고령인 데다 쓰러졌을 때 이미 심정지까지 왔다. 온 우주가 도와줘도 쉽사리 일어나지 못할 텐데 이승엽 홈런을 외치는 캐스터 목소리에 눈을 떴다니.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직후부터 사망설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모든 언론이 이 회장의 생사를 알아내기 위해 매달렸지만 호전되고 있다는 삼성 측의 녹음기 같은 전언 말고는 이 회장의 상태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굴지의 기자 정신을 발휘한 기자들이 작년 여름 대포 같은 망원렌즈로 이 회장의 병실 내부를 촬영한 사진이 공개됐지만 깨알만 하게 보인 이 회장의 모습으로 그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사진이 공개된 지도 벌써 아홉 달이 지났다. 삼성의 말처럼 상태가 호전 중이었다 해도 그사이 병세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알 수 없다. 의학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나. 증세가 호전되는 것 같던 환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장면.
결국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이 회장이 자발 호흡은 하는지, 인지 능력은 회복됐는지, 삼성 측의 주장처럼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누비며 재활에 힘쓰고 있는지, 지난 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패망 사실은 알고 있는지. 그래서 워커스의 첫 번째 미친 짓은 ‘이건희 회장의 생사를 확인하라’. 이건희 회장이 입원해 있는 삼성서울병원 잠입 취재다.
이건희 개인의 생사가 뭐 그리 중요하기에 워커스는 창간호부터 병실 잠입을 시도하는가. 그건 이 회장의 생사에 ‘이씨 왕조’나 다름없는 삼성 그룹의 후계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의 상태에 따라 삼성 그룹의 승계 과정에는 막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후계로 낙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내야 할 상속세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확인해 주지 않는 이상 이 회장의 정확한 재산 총액은 알 수 없지만 항간에 떠도는 풍문으로 짐작하면 이 회장은 약 12조 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선 6조 원 이상의 ‘현금’이 필요하다. 2013년, 상속법의 개정으로 상속세는 주식 현물로 낼 수 없고 오직 현금으로만 내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 그룹의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승계하려면 상속세를 다 내고도 그룹에 대한 지배력이 아버지 시절보다 약해져선 안 된다. 거기에 더해 상속세 마련을 위해 순환 출자 구조를 정리하더라도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에 대한 삼성 그룹 내부의 지분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 6조 원에서 많으면 10조 이상의 현금을 마련해야 하고 그 현금 준비 과정에서 삼성생명이나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으로 얽힌 순환 출자 구조를 지켜 내면서 동시에 그 일을 (적어도 보이기에는)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내야 한다. 그래서 이재용 부회장은 할 일이 많다. 이 복잡한 작업을 완료하기 전에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 승계 구도는 혼란에 빠진다. 상속세 납부는 이건희 회장의 사망 시점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아버지, 전 아직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은폐 엄폐는 어렵다
삼성서울병원은 거대하다. 의사만 1천400명이 넘고 병상도 2천여 개에 달한다. 4천 평이 넘는 부지에 건물만도 여럿이다. 이건희 회장이 있는 병동 건물을 찾다가 길을 잃었다. “삼성병원이요”라고 말했더니 삼성병원 장례식장에 내려 준 택시 기사 아저씨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삼성병원 본관까지는 엄청 멀다. 사실 병원 직원 아무나 붙잡고 입원실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될 일이지만 ‘이건희 회장의 병세를 확인하러 온 기자’라는 비밀스러운 신분이다 보니 괜히 말을 아끼게 된다. 이번엔 힘겹게 찾아간 본관 로비에서 길을 잃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지하 1층 푸드코트에 있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연습장을 꺼내 침투 경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첩보 영화를 즐겨 본 게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이야. 내가 워커스의 제이슨 본. 병원 안내도와 연습장을 꺼내 들고 첩보원 코스프레를 하느라 1시간여를 보냈지만 정작 마땅한 작전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머리부터 들이밀어 보는 수밖에 없다. 정면 돌파. 1층 로비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정처 없는 기웃거림의 시간이 20여 분 지나도록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안내데스크를 찾았다. “이건희 회장님 병실이 어디예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안내데스크 직원은 당황한 얼굴로 우물쭈물거리며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하겠지?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재기발랄한 다음 대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세계 초일류 기업인 삼성이 운영하는 병원은 역시 직원 교육도 수준급이었다. “VIP 병동에 입원해 계십니다. 무슨 일이시죠?” 그 순간 당황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마땅한 대답을 못 찾는 쪽은 내가 됐다. “그냥 궁금해서요”
작전상 후퇴다. 절대 창피해서 그런 게 아니다. 로비를 빠져나와 주차장 한쪽으로 도망쳐, 아니 이동해 또 다른 병원 직원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청소 노동자들을 발견했다.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접근했다. 중년 여성을 대하는 친근감은 내 지나친 취재력의 근간이다. 내가 바로 워커스의 삼둥이. 길만 걸어 다녀도 아줌마들이 막 말을 건다. “이건희 회장 입원해 있는 거 본 적 있으세요?” “난 모르겠어요.”
질문부터 대답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은 유유히 사라졌다. 혹시나 해서 주차 관리 직원에게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이건희 회장과 삼성 그룹의 위엄은 내 친화력과 취재력마저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더욱 정교한 작전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일단 오늘은 철수.
본의 아닌 이실직고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이건희 회장은 22층 VIP 병실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일반 환자들은 물론 삼성병원의 의사들도 허가를 받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내밀한 곳이라는 첩보. 마치 임금님이 머무는 구중심처 같은 그곳에는 VIP 전담 의사는 물론 전담 간호사와 청소 직원도 있다고 한다. 외부 세계와 구중심처를 연결하는 VIP 전용 엘리베이터가 응급실 부근 어딘가에 있다는 정보도 전해 들었다. 남은 건 그 엘리베이터를 찾아내는 일과 그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일이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찾기 위한 응급실 진입 전, 지하 커피숍에 다시 앉아 침투 작전의 동선을 짰다. 문으로 몰래 들어가서 조용히 내부를 살핀다는 정교한 작전을 완성한 후 응급실이 있는 1층으로 올라갔다. 기다려라 이건희.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 은폐 엄폐에 신경 쓰며 응급실로 잠입했다. ‘아무도 못 봤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가 말을 걸어 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환자 보호자입니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라고 안도하는 순간 간호사가 다시 말을 걸었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성지훈이요.”
전용 엘리베이터 탐색은커녕 응급실 문턱에서 제지당하고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응급실 입구만 쳐다보면서 다음 작전을 구상 중일 때 병원 보안 직원이 내게 다가왔다. “금연 구역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조용히 물러나야지. 다시 오늘도 철수.
이제 엘리베이터까지 왔다
다시 병원을 찾은 날은 설날이었다. 민족 최대의 명절. 자고로 명절엔 응급실에 환자가 차고 넘쳐 혼란스럽기 그지없다는 이야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다. 혼잡한 만큼 접근하기 더 쉽겠지. 내가 전략을 이렇게 잘 짠다. 워커스의 히딩크랄까.
문 앞에 앉아서 내부를 탐색하다 검사를 받으러 가는 환자 한 명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리곤 당당히 응급실 입장. 들어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간호사가 다시 찾아왔다. “누구 찾으세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까 기억해 둔 환자의 이름을 댔다. 그리고 검사실 위치를 안내받으며 암묵적으로 응급실 내부 활보 프리패스를 얻었다. 내가 더는 거동이 수상한 자로 의심받지 않고 있다는 건 느낌적인 느낌으로 아는 거다.
응급실 안팎을 살피면서 수상한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경비 직원이 서 있는 이유는 둘 중 하나겠다. 엘리베이터를 지키거나, 엘리베이터가 태우는 사람을 지키거나. 최대한 순박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접근해 아무렇지도 않게 버튼을 누르려는데 경비가 제지한다. “어디 가십니까?” 순간 솔직하게 이건희 회장을 만나러 왔다고 말할 뻔했다. 위압감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다. 여기서 이 사람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할지, 기회를 보다가 내 자랑거리인 민첩한 몸놀림으로 엘리베이터에 잠입해야 할지를 고민하다 가까스로 결정을 내렸다. “엑스레이 검사실 찾는데요.” 삼성병원은 경비도 친절하다. 일반 검사실 부근까지 직접 데려다주더라.
철옹성을 넘는 법은
사실상 이건희 회장 병실 침투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위클리매드코리아’가 ‘미친 짓’을 하는 기획이긴 하지만 이렇게 맨땅에 헤딩하듯 병실에 잠입할 수 있을 거라곤 편집국도 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취재 과정 내내 느낀 건 삼성 병원의 편집증적인 서비스 마인드였다. 누구 하나 불친절한 사람이 없고 동시에 누구 하나 허술한 사람이 없다. 마치 ‘삼성’이라는 거대한 자본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 같았다. 치밀하고 거대한 철옹성. 이 기사를 쓰는 와중에도 이재용 부회장은 지주 회사인 삼성물산 주식을 추가 매입하고 SDS 주식을 매각해 현금을 마련하는 등 그룹 승계에 박차를 가했다.
그 성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이건희 회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오리무중이다. 이 회장의 생사에 따라 삼성 그룹 승계 구도가 변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취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를 마무리할 즈음엔 이 회장이 죽었든 살았든 삼성 그룹은 원하는 바를 결국 이룰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완전히 실패로 끝난 병실 침투처럼 이 철옹성을 뚫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다는 무력감. 도대체 저 성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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