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연대기 – 장애인 이동권 투쟁 ②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 활동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 사진- 정운
“아저씨 이름이 ‘이동권’이야?”
서명대를 지나가던 꼬마가 묻는다. 처음 듣는 단어라 사람 이름인 줄 알았나 보다. 누가 다니지 못하게 막는 것도 아닌데 장애인 이동권이라니. 지금은 익숙한 ‘장애인 이동권’이란 말이 2000년대 초만 해도 낯설었다. 노들장애인야학의 박경석 교장은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말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대중적인 말이 아니었다고 했다.
“대중교통을 못 탄다고 설명하니까 애가 ‘왜 못 타냐’고,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어요. 버스는 사람들이 장애인을 들어서 태우면 되고 지하철은 리프트도 있지 않냐고. 장애인 이동권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삶의 요구가 아닌 거죠.”
사람들은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흔하게 보는 풍경 속에서 장애인들이 짐짝 취급을 당하며 느끼는 모욕과 불편과 위험을 생각하지 못했다. 중증 장애인들이 서명 운동도 하고 사다리를 걸고 선로 점거도 하자 사람들은 말뜻을 알아 갔다. 그 결과 2003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신어 자료집에 ‘장애인 이동권’이란 말이 실렸다.
2002년 5월 지하철 5호선 발산역에서 리프트 추락으로 또 한 명이 사망했다. 지방 선거를 앞둔 참사였는데 당시 선거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돼 시장의 책임을 물으며 쫓아다녔다. 서울시청 복지과를 갔다가 쫓겨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점거 농성을 했다. 이전과 달리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중증 장애인들이 전면에 나선 투쟁이었다.
“서울시청 점거 농성에 실패해 본관 식당에서 며칠 있는데 거기서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이 보여요. 저기서 하면 안정적으로 하겠다 싶었어요. 당시엔 인권위가 만들어진 지도 얼마 안 돼 쉬웠지요. 처음엔 2~3일 정도 생각하고 단식 농성단을 15명 정도 조직해 들어갔는데 길어졌어요. 척수 장애인이 39일을 했으니 엄청난 거였지요.”
조금씩 보이는 장애인 이동권
서울시는 2002년 9월, 저상 버스를 도입하고 2004년까지 전 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방향을 완전히 바꿔 냈다. 기쁜 마음으로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더딘 변화는 또 장애인의 목숨을 앗아 갔다. 2003년 5월 지하철 1호선 송내역 승강장에서 시각 장애인이 추락 사망했다.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이동권연대)는 사람들이 많은 5호선 광화문역 선로를 점거했다. 연행과 벌금을 최소화하려고 몇 명만 선로를 점거하고 빠져나왔지만 CCTV에 찍혔다. 김도현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당시에는 노들야학을 잠시 휴직하고 인권운동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요, 선동하고 정리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갔다가 CCTV에 재수 없게 찍힌 거죠. 이전 에바다 투쟁으로 집행 유예 기간이라 구속 영장이 나왔어요. 여러 투쟁으로 실무자가 별로 없었을 때여서 경석이 형이 ‘너 내일 구속되니까 들어가기 전에 성명서 쓰고 들어가라’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황당했지만 그 정도로 일손이 없단 뜻이니까 미안했어요. ‘김도현 동지 구속을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제가 쓰고 감옥에 들어갔어요.”
김도현은 8개월 동안 감옥에 있다가 2004년 4월에 나왔다. 그때는 장애인 이동권 입법 운동의 끝자락이었다. 10월에 ‘장애인 등의 이동 보장 법률 제정과 장애인 교육 예산 확보를 위한 공동 농성단’이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며 마포대교 점거, 열린우리당 당사 점거 싸움을 했다. 그 결과 12월 29일 이동권 조항과 저상 버스 도입의 의무화가 명시된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2002년 장애인 이동권을 헌법 소원 했다가 패소한 날 박경석은 장애인 이동권은 법이 아니라 우리의 주먹에서 나온다며 동료들과 울분을 토했다.
그 무렵 이동권이라는 특정 사안만이 아니라 장애인 문제 전반을 다루는 상설 조직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7월에 이동권연대는 ‘진보적 장애운동 연대체 건설을 위한 장애운동 활동가 수련회’를 열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기초를 만들어 갔다. 전장연은 지금까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이어 가고 있다.
장애인이 편하면 모두가 편하다
“2014년부터 시작한 고속버스 투쟁은 일종의 의제 개발이죠. 그전에도 KTX 투쟁을 했지만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는 법률이 정한 이동권 보장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시 전장연에 들어오고 법과 시행령을 보니까 고속버스가 적용 대상이 아닌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이동권 투쟁을 시작했지요.” 김도현의 말이다.
지하철이 있는 서울을 비롯한 광역시에서는 지하철 엘리베이터만 있어도 이동권은 어느 정도 보장된다. 하지만 지하철이나 저상 버스가 없는 지역에서 이동권은 여전히 주요 의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많이 좋아졌다며 장애인들이 욕심을 부린다고 한다. 엘리베이터가 생기고 저상 버스가 생기니 노인이나 아이들도 쉽게 지하철과 버스를 탄다. 장애인에게 편한 건 다른 이들에게도 편하다는 걸 직접 보여 줬지만 딱 거기까지다.
박경석은 “고속버스도 꼭 타야 해?”라는 물음 속에 장애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동등한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별이란 보장되지 않은 걸 보는 거예요. 충분하다가 아니라 얼마나 부족한가를 봤으면 좋겠어요.”
김도현은 아직 장애인 이동권은 갈 길이 멀다고 덧붙였다. “10년 넘게 싸웠는데 장애인은 이제 자유롭게 이동하는가? 그렇지 않아요. 지금 이만하면 됐다는 식의 생각은 우리 사회가 차별을 수용하는 정도와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 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