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과 비하에 시달리는 탈북 여성들
신나리 기자/ 사진 임태훈
탈북은 한국 사회에서 이용 가치가 있는 소재다. 선거를 앞두고 혹은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북한 미사일, 탈북, 간첩은 자주 등장하는 이야깃거리다. 4.13 총선을 닷새 앞두고 정부가 ‘북한 해외 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을 발표한 것 역시 보수 표를 결집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존재하지만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존재. 정치와 사회면에 반짝 이용되는 북한 이탈 주민(탈북자)의 삶 뒤에는 한국 사회에서 겪는 일상의 차별이 있다. 북한 이탈 여성(탈북 여성)의 경우는 더하다. 이들은 탈북자이자 여성이라는 ‘복합적 소수자’라는 위치에 놓여 있다. 전체 탈북자 수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월등히 높지만, 이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해도는 낮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1276명에 달한다. 이 중 여성이 1000명이 넘는다. 2014년, 2013년 역시 탈북 여성의 수는 1000명을 넘은 반면 남성의 경우 300여 명이다. 2013년 통일부는 전체 탈북자 수 2만 4934명 중 여성이 69%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탈북 여성은 정신적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비율이 전국 성인 남녀의 우울증 발병률보다 높다. 2012년 여성가족부가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의뢰해 20~50대 탈북 여성 1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26.4%(37명)가 주요 우울 장애로 의심되는 심리 상태였다.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신체 상태도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건강이 악화한 주요 원인은 북한에서 제3국을 거쳐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는 성폭력 등의 피해 때문으로 분석됐다. ‘북한에서 왔다’는 고백 뒤 이어지는 이들에 대한 차별과 위협, 여성으로서 맞닥뜨린 두려움을 들었다.
“북에서 왔다” … “DVD방이나 가죠?”
아무래도 마음이 찜찜했다. ‘짠’ 하고 술잔을 마주칠 때 숨긴 게 있다고 고백했다. “사실은 강원도가 아니라 북한에서 왔어요.” 남자는 잔을 그대로 내려놨다. 남자는 이후로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왜 왔어요? 그쪽이 많이 힘들어서 온 거예요?” 참 쉽게 물었다. 걱정이 아닌 깔보는 느낌이었다. “자유를 찾아 왔죠.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라고 답했다. “그쪽에서 진짜 사람이 (굶어서) 죽어 나가요? 거기는 뭐 먹고 살아요?” 남자가 질문을 이어 갔다. 남자의 질문이 상처로 꽂혔다. 소개팅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자리를 마무리하려고 하니 남자가 붙잡으며 말했다. “한국 문화 잘 알아요? 우리 2차로 DVD방이나 가죠.”
오가윤(가명) 씨 고향은 함경북도 A 시다. A 시는 평양 못지않게 잘사는 지역이다. 바다와 가까워 외국인 등 다양한 사람이 오간다. 남자의 질문처럼 굶은 적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본 적도 없이 자랐다. 이모부는 고위직 간부였다. 엄마는 중국을 오가며 밀수를 했다. 돈과 배고픔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남한은 드라마로 배웠다. <가을동화>,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이 담긴 CD를 구해서 보고 또 봤다. 남한 드라마를 보다 걸리면 벌이 컸다. 몇 개월 수용소에 갇히기도 하고 누구는 방망이로 이마를 맞아서 죽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총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드라마 보는 재미를 참을 수 없어 이불로 텔레비전을 덮고 드라마를 봤다. 이승철을 좋아해 <희야>를 즐겨 부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한국말 따라 하기’가 조용한 유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상한 억양이었을 뿐인데 친구들끼리 한국말이라며 연습하고 놀았다. 우연히 이 소리를 들은 선생님이 “그러다 큰일 난다”며 주의를 주기도 했지만, 은밀한 유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가윤 씨는 A 시의 한 무용단 소속이었다. 김정일도 보고 간 실력 있는 무용단이다. 하지만 꿈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한 음악을 계속하길 바랐지만 그게 새롭거나 신기하거나 재밌는 일은 아니었다. “너 중국 가서 살래?”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나 갈래 갈래 갈래, 꼭 가고 싶어” 두 손을 번쩍 들며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어도 많이 없었다. 혼자 살 엄마를 생각하지 않고 마냥 신이 났다. 돈 많은 나라, 재밌는 것이 많은 나라, 엄마에게만 듣던 중국에 가서 살 생각에 좋았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두 가지를 알았다. 엄마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것, 최종 도착지가 남한이라는 것.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스무 살도 안 된 가윤 씨는 그렇게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남한 땅을 밟았다. 2000년대 말이었다.
처음 머문 곳은 천주교 단체에서 마련해 준 쉼터였다. 수녀님은 9시를 통금 시간으로 정했다. 그곳에서 대학 갈 준비를 하며 종로에 영어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수녀님들 외에 처음 밥을 먹은 남한 사람은 학원에서 함께 영어 공부를 했던 이들이다. 점심마다 함께 밥을 먹었는데, 사투리가 심했던지 무리 중의 한 명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북한에서 왔다고 답했다. 다음 날 점심은 혼자 먹었다. 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3년 동안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강원도라 답했다.
“북한 여자가 왜 그래?”
가윤 씨는 북에서 연애를 두 번 했다. 한 번은 꽤 오래 만나며 사랑을 키웠다. 열여섯부터 3년간 만난 남자 친구였다. 당시 북한은 남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모시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남자 친구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다정했고, 가윤 씨를 살뜰히 챙겼다.
한국에서 만난 남자들은 낯설었다. 무엇을 하든 ‘북에서 온 너는’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원하는 것을 말하면 “북한 여자도 그래?”라는 반문이 돌아왔다.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데이트할 때, 성관계를 할 때 가윤 씨가 원하는 것을 말하거나 리드하려고 하면 “북한 여자가 왜 이래?”라고 따지는 일도 있었다. “남자가 다가오면 부끄러워하고 어쩔 줄 몰라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말한 남자도 있다. 북에서는 남자가 최고이고 아빠가 짱이고 여자는 남자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다. 기가 막혔다. 이 때문에 헤어진 적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사랑은 고팠다. 아무도 없는 남한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마음에 맞는 사람, 외로움을 덜어 줄 사람,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게 함께할 사람이 그리웠다. 자신감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완전히 혼자 사는 이곳에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누가 나를 도와주나 두려움이 컸다.
신변 보호를 하는 담당 형사도 한국 남자와 별다르지 않았다. 가윤 씨의 이사나 형사의 이동에 따라 담당 형사는 여러 번 바뀌었다.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처음 찾게 되는 사람은 아니다. 찾아서 오히려 이상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가윤 씨를 담당했던 한 형사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신랑이었다. “너랑 있으니까 너무 좋다. 나는 사실 결혼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했다.” “우리 자주 봤으면 좋겠다. 너랑은 얘기가 잘 통해서 좋아.” “북한에서는 여자가 남자한테 잘한다며? 너도 북한 여자니까 엄마가 아빠한테 잘하는 거 많이 봤겠네?” 형사가 가윤 씨에게 던진 말이다. 만나면 어깨동무를 하는 등 아무렇지 않게 스킨십을 했다. 틈만 나면 “뭐 하냐”는 연락을 하고 “잠깐이라도 만나자”고 했다.
결혼한 남자에게 속은 적도 있다. 음악 특기를 살려 한 라이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만난 남자다. 손님들이 집적거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곳이다. 사장은 사장대로 손님이 떨어질까 이런 손님들에게 전화번호를 주라고 강요한다. 낮에 따로 만나자는 연락도 자주 온다. 그러던 중 손님으로 왔던 한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됐다. 듬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와 연애를 했다. 가윤 씨 이모와 사촌들을 남한에 데려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처음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고 하더니 3명을 데려오려면 1000만 원이 넘게 든다며 돈을 요구했다. 일단 500만 원을 주고 들어오면 나머지 돈을 주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이모와 사촌, 아무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모르는 여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 남자였다. 그는 아내와 헤어지겠다며 가윤 씨를 붙잡았다. 처음엔 가윤 씨도 그를 믿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헤어지지도, 이모와 사촌을 데려오지도, 500만 원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너 혼자잖아. 내가 지켜 줄게”
가윤 씨가 겪은 일들은 다른 탈북 여성에게도 드물지 않은 일이다. 이들은 고향과 가족, 친인척과 완전히 단절된 남한에서의 삶은 ‘외로움의 본질’부터가 다르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를 이용하는 남성들이 많다고 고백한다.
2000년대 중반 한국에 온 박나미(가명) 씨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중국에서 탈북을 도와준 한 종교인에게 스토킹을 당했다. 그는 탈북자의 인권 보호를 말하며 탈북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한국에 들어와서 벌어졌다.
나미 씨의 집을 알고 있던 그는 밤이고 낮이고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너 혼자잖아. 내가 지켜 줄게, 내가 돌봐 줄게.” 문밖에서 그가 외쳤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 집 앞으로 찾아오는 그 때문에 한동안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하며 살았다. 나미 씨가 그를 만나 주지 않자 그는 ‘내가 너 중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다 폭로할 거야’라는 협박부터 ‘나는 너를 진짜 사랑한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니 나만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나미 씨는 누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방 안에서 울기만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주변 사람에게 꺼낸 적 없다. 소름이 돋고 끔찍한 시절의 이야기다.
15년간 엄마가 죽은 줄로만 알고 살았던 서지호(가명) 씨는 엄마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를 만나러 중국으로 향했다. 지호 씨 엄마는 브로커를 통해 20대 초반의 지호 씨를 남한으로 데려왔다. 지호 씨는 곧 일자리를 구했다. 면접에서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이 나왔다. ‘북한’이라고 답했다.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은 회사였기에 사무실 사람들은 대부분 지호 씨가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됐다. 지호 씨는 회사 생활을 했던 3년간 다섯 번 이상 직장을 옮겼다. 6개월 이상 다닌 적이 없었다. 다닐 수가 없었다. 밤이면 회사의 대리, 과장, 상무, 다양한 직위의 사람들이 “술 한잔 하자”, “보고 싶다”, “지금 좀 만나자”며 전화를 했다.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지호 씨에게 다음 날 그들은 차가운 목소리로 일을 시켰다. 오가며 툭툭 치기도 했다. ‘내가 북에서 왔다고 우습게 보이나?’ 지호 씨는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안 그런 곳이 없었다. 다섯 곳의 회사에서 비슷한 일들이 계속됐다. 결국 회사 생활을 그만뒀다.
남한에 도착한 경로와 배경, 상황은 다르지만 탈북 여성이 겪는 일들은 비슷하다. 한국 남성들이 가진 탈북 여성에 대한 편견과 비하에 수시로 노출된다. 스토킹이나 성희롱을 겪어도 도움을 요청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에 상처는 안으로 곪는다. 지나고 나서야 ‘이런 일이 있었다’ 토해 낼 뿐이다. 전담 센터가 있다고 해도 심리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센터를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허수경 무지개청소년센터 남북통합지원팀장은 “탈북 여성들은 자신이 탈북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린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여성 폭력 문제는 은밀한 부분이라 상담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데,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어려워한다”며 “관련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거나 의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폭력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전했다.
(워커스 6호. 2016.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