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 봄날의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 동물애호가
오전에 신나게 도서관을 가는데 엄마로부터 전화가 두 번이나 왔다. 블루투스를 설정하지 않은 탓에 받지 않았다가, 도착지에 내려 전화를 거니 엄마는 애가 탔는지 격앙된 목소리다. 무슨 용건이냐는 내 물음에, ‘할아버지 할머니 비석 세우는데 아빠 비석도 세울 거야. 네 남편 이름 비석에 넣어야 하니 말아야 하니? 너 그 녀석이랑 안 살 거지? 맞아?’하며 날을 세운다.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물음에 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엄마, 앞으로 그 사람하고 살 일 없어. 그리고 나 재혼하면 비석 다시 바꿔야 하는데 그래도 넣을 거야?’
그제야 엄마는 답을 찾은 듯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내가 다시 결혼을 해서 행복해지길 바라나보다. 그러나 이제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남편과 별거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그와 그의 부모가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고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고를 바탕으로 한 소위 매너 없는 언행들까지. 무엇보다 큰 이유는 아이들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남편 역시 ‘남녀평등 운운하지 말고 네 삶이나 잘 돌이켜봐’라는 말을 했으니 우리는 같은 이유로 헤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의 입장은 이러했다. ‘남녀가 평등하지 않은데, 너는 너의 역할을 하지 않으니 문제다. 개선하지 않겠다면 결혼을 유지하지 않겠다’라는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한 요구조건이었다. 생활정치에서의 다툼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지만 감정소모가 그 어느 사안보다 크고,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할 수밖에 없다.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이 십년 간 지속 됐다면 이제는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십 년이나 투쟁했는데 변화하는 게 전혀 없으니 사실 포기하고 싶었다.
남편이 잘못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던 거짓말쟁이 시부모도 없고, 가부장제에 순응해서 그래도 잘살아보라고 다그치는 친정식구들도 더는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끔 남편이라는 존재가 불쑥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 동안도 남편 없이 잘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란 생각이 든다. 워낙에 유대감이 없어서인지, 그 사람의 존재감이 가정 내에서 미약해서였는지 모르겠다. 현재까지는 아쉬운 것이나 꼭 필요한 부분의 결핍은 존재하지 않는다.
별거 뒤 생긴 ‘나만의 방’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나면 벗어놓은 옷가지들과 세탁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서 세탁기에 돌리고 어질러진 책들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고 청소기도 돌린다. 얼추 가사노동이 끝났다 싶으면 커피를 한잔 타서 빈 식탁에 앉아 책을 편다. 인터넷으로 강의도 듣고, 책도 보고 오전 대부분을 이렇게 책을 보면서 지낸지 몇 주가 흘렀다. 행복하다. 이렇게 내 시간이란 것을 갖기 까지 나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나만의 방’ 없이 보냈는지 모르겠다. 결혼 이후 처음 누리는 호사가 오전 시간에 책보기다. 겨우 집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고 다시 반납하는 것이 유일한 자유지만, 막둥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오전의 3~4시간이 온전히 내 시간이 된 셈이니 너무 소중해서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바람뿐이다.
이 시간을 갖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내 마음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다시 주워 모아 붙이기를 반복했을까?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낼수록 세상에서 가장 나쁜 년이라 욕을 먹었다. 날 때부터 이렇게 생겨먹어서 이런 건데 내 자신이, 내 사고가 마치 죄인 양 끝도 없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노예의 삶이 싫었다. 내 몸, 내 생각, 내 시간,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에게 맞추고 그 부모에게 맞추며 사는 삶이 싫었다. 먹고 살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립 서비스라도 해야 하는 양 벌어오는 돈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되도 않는 꾸지람도 싫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잠도 잘 자고 먹기도 잘 먹고, 마음도 따셔졌다. 불면증도 잊게 됐다. 남편의 뒤에 서서 호랑이 같은 얼굴을 하고 귀신같이 노려보던 시부모도 없고, 밤이고 낮이고 나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편이 없으니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이제 나만 온전히 행복하면 된다. 이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지 않도록 더 잘 보듬고 온기를 불어넣으면서 유지하면 된다. 비록 경제적 문제가 있지만, 내 마음은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음이 분명하다. 더는 스스로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게 되었고, 아이들과 웃으며 살고 있다. 혹시 몰라 행복하냐고 물을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도 행복하다고 대답해주곤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 했을 때 느끼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배워가는 요즘이다.
남편과 시댁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내 존재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들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핍되었던 시간만큼 나는 더 즐겁게 살 것이다.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재단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같은 선택을 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워커스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