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수협이 노량진 구 수산시장의 전기와 물을 끊었다. 그야말로 암흑천지다. 상인들은 촛불을 밝혔다. 손님들은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시장을 오갔다. 이렇게 이곳저곳의 점포들에서 다시 불빛이 새어나왔다. 노량진 구 수산시장은 암흑 속에서도 여전히 ‘시장’이었다.
고법 “구 시장 상인들, 건물 무단 점유 아냐”
수협의 탄압 속 ‘열린 시장’을 만든 상인들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노량진 구 시장 상인들의 완전한 승소였다. 서울고등법원은 11월 16일 수협과 노량진수산(주)이 구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앞서 수협은 상인들이 구 시장 건물을 무단으로 점유해 약 37억5천만 원 상당의 피해를 봤다며 소를 제기했다. 상인들의 무단 점유로 주차장을 사용하지 못해 5억5천만 원을 손해 봤고, 용역비 약 32억 원을 불필요하게 썼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수협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구 시장을 철거의 대상이 아닌 ‘시장’으로 봤고, 수협에 맞선 상인의 저항을 ‘시장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 판단했다.
수협과 노량진수산(주), 상인의 관계는 복잡하다. 수협은 노량진 구 시장 건물과 주차장의 소유자다. 노량진수산시장의 법적 개설자는 서울시다. 서울시가 5년 단위로 노량진수산(주)을 도매시장법인으로 지정해 왔다. 이에 따라 노량진수산(주)은 수협과 임대차계약을 맺고 구 시장 건물을 관리·운영했다. 다시 상인들은 노량진수산(주)과 전대차계약을 맺고 각 점포에서 장사를 했다. 그런데 수협과 노량진수산(주)은 상인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고 신 시장을 건축, 2016년 3월 15일 개장했다. 이 시점에서 수협과 노량진수산(주)의 구 시장 건물 임대차계약이 종료됐다. 동시에 서울시도 중앙도매시장 개설 장소를 구 시장에서 신 시장으로 바꿨다. 이로써 구 시장에 대한 사업·운영 주체는 사라진 격이 됐다.
시장 상인들은 신 시장 입주를 거부했다. 수협이 시장 상인 의견을 묵살한 채 공사를 강행한 결과, 장사할 수 없는 ‘밀폐형 복층 시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구 시장에서 장사를 이어갔다. 그러자 수협은 구 시장 주차장을 차단하고, 신 시장 주차장을 이용하라는 공고문을 붙였다. 반면 구 시장 상인들은 구 시장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주차장을 무료로 개방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차량 안내도 했다. 주차증도 자체 발급해 상인과 고객 간 차량을 구분하는 등 편의를 도왔다.
재판부도 이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구 시장 주차장 건물을 폐쇄, 철거하려 했기 때문에, 주차장 사용에 따른 이익을 기대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상인들은 구 시장을 찾아온 고객들이 이전과 같이 이용할 수 있게 폐쇄 상태를 개방 상태로 만들면서 주차장으로서의 이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노량진수산(주)는 과거 주차료를 징수하며 관리했는데, 상인들이 주차료를 받았다고 볼 자료도 없다. 따라서 상인들이 주차장 건물을 전면적으로 지배해 그들 스스로 사용, 통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한편 노량진수산(주)은 구 시장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2016년 3월부터 2018년 4월까지 에스티시스템이라는 업체에 용역비 32억 원을 지출했다. 노량진수산(주)은 상인들에게 이 비용을 청구했으나, 재판부는 구 시장 임대차계약이 종료된 2016년 3월 이후 노량진수산(주)이 구 시장에서 행사할 역할이 없다고 봤다. 계약상 관계에서 벗어난 자가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을 쓴 셈이고, 구 시장 상인들에게 이를 청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집단 이기주의? 이권 다툼? “신 시장, 직접 가보세요”
구 시장 상인들이 신 시장으로 입주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처음에는 시장 상인들도 현대화 된 시장을 기대했다. 신 시장에서 더 편하고 청결하게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수협은 2015년 말 신 시장이 완공될 때까지 출입을 제한했다. 완공 뒤에야 신 시장을 둘러본 상인들은 건물 구조에 경악했다. 이들은 의견 수렴 없이 공사를 강행한 수협의 책임을 물었다. 이때부터 상인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워커스》가 만난 상인들 대부분은 시장 건물 구조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구 시장의 구조는 단층에 수평이동이다. 점포들이 하나의 큰 골목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 덕에 손님들은 한 번의 이동으로 거의 모든 상품을 볼 수 있다. 반면 신 시장은 바둑판식 복층형으로 손님이 점포를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없는 구조다. 통풍과 환기도 문제다. 구 시장은 사방이 뚫려있지만, 신 시장은 밀폐형 건물로 통풍이 어렵다. 곳곳에 곰팡이가 핀다는 상인들의 증언도 나온다. 게다가 지하 2층에는 스티로폼 소각장이, 1~2층에 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스티로폼 소각은 발암물질 발생을 일으키는데, 위층에 시장이 자리하고 있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또 건물 중앙 냉·난방 시스템 때문에 식품이 부패하기 쉽다.
임대료 폭등도 만만치 않은 문제다. 상인의 말에 따르면, 구 시장 C동 점포의 경우 보증금 약 1900만 원에 월 임대료 약 18만 원, 월 부대시설비 15만 원 정도다. 같은 동 신 시장 점포는 보증금 2200만 원에 월 임대료 약 25만 원, 월 부대시설비 약 35만 원이다. 보증금은 약 300만 원 이상, 월세는 두 배 가까이 오르는 셈이다. 여기에 이사에 따른 수족관 제작, 냉장·냉동고 설치 등의 비용까지 더하면 상인에게 입주는 ‘빚잔치’와 다름없다.
27년을 일한 상인 김희옥(가명) 씨의 경우 입주에 필요한 돈이 3400만 원에 달한다. 보증금 임대료 인상과 더불어 수협이 구 시장 관리비를 ‘폭탄 청구’한 까닭이다. 김 씨는 2016년 3월부터 전기세, 수도세 고지서를 받지 못했다. 신 시장에 입주하지 않았으니 관리비를 고지하지 않은 것이다. 고지 받지 못한 상인들은 구 시장에서 장사를 이어갔는데, 몇 주 전 그간의 관리비가 ‘부당이득금’으로 돌아왔다. 30개월 10일 동안 김 씨가 ‘부당하게 이득을 취했다’는 금액은 1200만 원. 내역을 보니 한 달에 5만 원도 나오지 않던 수도·전기세가 40만 원까지 나왔다. 그는 구 시장에서 이대로 쫓겨난다면 시장을 아예 떠나 단기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알아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용역 폭력에 굴삭기까지…매일이 ‘전쟁’
“집단 이기주의? 시장 지키려는 마음뿐”
수협은 구 시장 상인들을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다. 11월 20일 오전 9시경, 수협이 굴삭기를 동원해 구 시장에 들이닥쳤다. 기습 철거였다. 굴삭기로 구 시장 입구 쪽 시멘트 바닥 10미터가량을 깼다. 여기에 말뚝을 박고 구 시장 차량 출입을 막을 요량이었다. 상황을 목격한 상인들이 굴삭기를 둘러쌌다. 자신의 차량을 가져와 굴삭기 이동을 막는 상인도 있었다. 몸싸움이 격화되자 상인 한 명이 다쳐 병원으로 후송됐다. 경찰 병력이 불어나자 수협 직원들이 물러났고, 상인들은 신 시장 앞에서 연좌하고 집회를 이어갔다.
“우리의 저항이 언론에 집단이기주의로 보도될까 걱정부터 되네요. 우리들이 억대 매출이라고요? 집단 이기주의라고요? 20년 동안 갈치와 꽃게 팔면서 아들 둘 겨우 대학에 보냈습니다. 등록금도 전부 대주지 못하고 일부만 도와줬어요. 저는 그저 시장을 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이곳에 남아 싸우는 상인 대부분이 그래요. 이윤이 남지 않아도 시장에서 손님들하고 정 나누는 생활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권에 개입한 세력에 의해 시장이 없어질 판이에요. 신 시장은 이미 기능을 상실했고요. 여기 오는 손님들이 비싸고 장보기 힘들다며 구 시장으로 다시 와요. 이곳을 꼭 지켜낼 겁니다.”
11월 12일엔 어둠 속 추격전이 벌어졌다. 저녁 7시 반경 구 시장 상인들이 시장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던 때였다. 상인 김수환(가명) 씨는 불안한 마음에 수도관이 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수협의 단전·단수 후 상인들이 수도관을 고치면 다시 수협 직원이 망가뜨리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옥상 계단에 발전기로 켜놓은 전구가 꺼져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 전구를 돌려 끈 흔적이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니 실제로 수협 직원 3명과 용역 3명이 수도관 근처에 있었다. 이들이 김 씨를 발견하고 도망갔다. 한참을 쫓아가던 김 씨는 어둠 속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졌다. 그는 현재까지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불편한 걸음을 걷고 있다.
김 씨가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수협이 전기를 끊어서 상인들이 하루 임대료 10만 원이 넘는 발전기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수협이 시장 돌아다니면서 그것마저 철거하려 하잖아. 발전기 업체에 전화해서 ‘부서져도 책임 못 진다’고 얘기하고 다닌대요. 수협은 일단 불법을 저지르고 돈으로 막는다는 심보예요. 돈으로 언론, 정치권까지 다 주무르는데 우리는 뭐가 있어. 우리 얘기 들어주는 언론이나 정치인이 어디 있길 하나. 누군가 죽어야 얘기를 들어주나.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지난 11월 9일엔 상인 한 명이 시장에서 분신을 시도하는 일이 발생했다.
시장 법적 개설자는 ‘서울시’
상인 농성에 박원순 “시에 권한 없다”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 비상대책위원회 상인 약 10명이 11월 11일부터 서울시청 1층 로비를 점거했다. 이들은 노량진수산시장의 법적 개설자인 서울시에 수협의 단전·단수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상인들은 단전·단수 직후 관할 지역구인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실과 동작구청을 방문하고 면담을 했다. 그러나 지역구 의원실은 대책을 내놓지 않았고, 구청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회피했다. 상인들은 박원순 시장은 다를 것이라 기대하고 시청 농성에 돌입했다. 시청 로비 한 가운데에 ‘박원순 시장 면담요청서’가 적힌 피켓을 놨다. 상인 한 명은 11일부터 아예 단식을 시작했다. 하지만 면담은커녕 탄압이 시작됐다. 퇴거요청서만 수차례. 변상금을 부과하겠다고 엄포도 놨다. 시청 앞 상인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던 14일엔 청사 출입구를 봉쇄했다. 경찰이 후문에서 신분증을 검사했다. 농성 상인들이 먹을 음식을 통제하기도 했다.
김희선(가명) 씨는 문재인과 박원순에게 걸었던 기대가 더 큰 배신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저는 문재인이 대통령 되고 나면 노량진 수산시장 문제는 신속하게 처리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나 몰라라, 하고중재도안해요.최근에대통령이박근혜때있던 관료들 때문에 적폐 청산에 애를 먹고 있다죠? 서울시도 그렇다고 얘기하는데 전 이해할 수 없어요. 문제 해결에 있어 행정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시장이고 대통령 아닌가요? 그게 선출직에게 주어진 권력 아닌가요? 지금 서울시는 무능 그 자체입니다. 박 시장 탄핵하자 말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전창배 대책위 정책위원장은 “노량진 수산시장에 관여된 모든 정치, 행정 주체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상황”이라며 “동작구청과 지역구 의원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서울시는 해양수산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식이다. 우리는 서울시에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다. 서울시, 해수부, 동작구청, 지역구 의원 전부 다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현재 단전·단수라는 초유의 사태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청에 온 것이다. 농안법(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에 의한 시장 개설자가 서울시다. 여기 상인들도 납세하는 서울 시민이다. 하지만 서울시는 8일째 얘기도 듣지 않는다. 단전·단수로 물고기, 상인들이 죽어 가는데 말이다”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11월 15일 오후 11시. 박 시장이 퇴근길에 시청 1층의 농성 상인들과 마주쳤다. 전 정책위원장은 박 시장 앞을 막고 단전·단수 조치 해제와 면담을 요구했다. 박 시장은 “구 시장은 주거지역이 아니라 상업지역이기 때문에 시에서 단전·단수 관한 조치를 할 수 없다”, “수협이 우리(서울시)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잠깐이라도 얘기를 나누자고 요청해 봤지만, 박 시장은 5분 만에 자리를 떴다.
11월 19일. 8일째 단식하던 상인 윤 모 씨가 결국 탈진으로 쓰러져 응급 후송됐다. 이날 서울시는 11월 21일까지 시청에서 나가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1월 20일, 상인들은 박 시장 시민 공청회를 조직화하기 위해 시청 농성을 종료했다. 시청 농성을 벌였던 상인들이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다시 노량진수산시장으로 돌아가 장사하며 싸워나갈 것이다. 부디 우리의 싸움을 끝까지 지지해줄 것을, 민주주의 서울을 외치는 서울시로부터 어떤 시민권도 인정받지 못한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다시 시장으로 돌아간 상인들은, 오늘도 수협의 굴삭기 앞을 가로막고 장사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