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성지훈 기자
청년은 이 시대의 화두다. 그리고 또 이 시대의 호구다. 전체 노동자의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 노동 개악의 명분은 청년 고용 확대였다. ‘20대 개새끼’론이나 88만 원 세대 같은 담론들은 왜 분노하고 짱돌을 집어 들지 않느냐고 청년들을 타박한다. 온갖 말과 말이 나오지만 정작 진짜 청년들의 생각은 알 길이 없다. 사실 저마다의 삶과 생각을 가진 청년들을 단박에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이란 애초에 무리다. 그래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의 생각을 듣고 그들의 삶을 엿보고 가능하다면 한마디 말을 건네는 것뿐이다. ‘청년패널’은 그렇게 만들어진 기획이다. 그들 스스로 말하고 돌아보는 그들의 삶.
등장인물
정찬
28세. 서울의 대학원에서 정치를 공부하고 있다. 학부 생활은 경기도의 대학에서 했다. 자신을 전형적인 흙수저로 소개한다. 등록금이 없어 전액 장학금을 탈 수밖에 없었다는 생계형 모범생. 그럼에도 자신은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며 늘 웃는다. 활발함과 수다스러움 사이 어디쯤에서 ‘청년패널’의 대화를 이끌어 간다. 이번 대담 참가 패널 중 유일하게 연애를 하고 있다.
고건영
25세. 영화인(지망생). 대학에선 국문과를 ‘수료’했다. 졸업은 아직이다. 국문과를 나왔으면서 영화를 만들겠다고 독립영화 판에 뛰어들었다. 주로 하는 일은 잔심부름과 영수증 정리 같은 전형적인 막내 업무. 왕가위의 영화를 좋아한다.
박지원
22세. 지리교육과 3학년. 사범대에 다니지만 임용고시를 통과해 교사가 될 생각은 없다. 현재 장래 희망은 드라마 PD다. ‘드라마는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는데 실제로 만들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는 생각에 드라마 PD를 꿈꾸지만 정작 본 드라마는 별로 없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집에 TV도 없었다.
김지수
25세.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제출한 철학과 학사 논문이 탈락해 졸업은 못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취업 준비 중인 졸업 예정자. 출판사 취업을 희망하고 있지만 과다한 업무와 박봉으로 유명한 출판업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남지우
20세. 인문학부 새내기다. 고등학교 때 읽은 독일 이야기가 멋있어서 전공으로 독어독문학을 택했다. 고등학교 때 꿈꾸던 캠퍼스의 낭만과 현실의 캠퍼스가 달라서 조금 당황스럽지만 탈춤 동아리와 교지 활동으로 그 간극을 채우고 있다. 여름방학 동안 과외를 여섯 개나 해서 모은 돈을 펀드에 투자한 서대문의 큰 손.
학자금 대출, 청년 실업, N포 세대, 흙수저. 오늘의 청년들을 수식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불행하다. 지옥 같은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입학해도 연간 천만 원에 가까운 고액 등록금의 난관을 헤쳐야 하고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해 봤자 취업도 되지 않는다. 대학 시절 차곡차곡 쌓인 학자금 대출은 고스란히 신용 불량의 낙인으로 남는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꿈꾸지 못하는 세대. 꿈이니 희망이니 하는 말과는 애초부터 상관없는 세대. 그게 우리 사회의 청년이라고 알려졌다. 그래서 청년 세대는 분석의 대상이고 구제의 대상이고 연민의 대상이다. 트렌드에 맞춰 ‘청년패널’도 그 불행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다. 돈 없고 빽 없는 청춘들의 분노.
그러나 정작 청년들이 말하는 ‘불행’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높은 등록금과 학자금 대출이 부담이긴 하지만 모든 대학생이 등록금을 버느라 꿈도 희망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에는 과장이 없지 않고 가난이 삶의 많은 부분을 저당 잡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청춘이 거기에만 발목 잡혀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정찬 당연히 경제적인 문제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어요. 저만 해도 대학 4년 내내 한 달 용돈 10만 원으로 생활했거든요. 교통비를 줄이려고 고등학생인 동생 이름으로 교통카드를 만들어서 청소년 할인을 받기도 했어요. 점심은 늘 1800원짜리 학생 식당 밥이었어요. 친구들하고 술을 마시거나 유행하는 영화를 한 편 보는 것도 불가능했죠. 전액 장학금을 놓치면 학교를 더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공부했어요. 정말 힘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불행이라고 여기진 않았어요.
고건영 제가 일하는 독립영화계에는 그런 사연이 많아요. 저도 8일 연속 밤을 새워 촬영하고 10만 원 받은 적이 있었어요. 상업 영화 쪽은 많이 나아졌다고들 하던데 독립영화계는 여전히 열정 페이를 강요받는 일이 많죠.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점도 이해하지만 아무리 이해하더라도 힘든 건 마찬가지죠.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독립영화 판에 남아서 영화인을 꿈꾸거든요. 오늘 주제인 ‘불행 올림픽’ 같은 이야기, 자기가 가난해서 겪은 사연이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 술자리의 가장 흔한 술안주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가난을 곧 불행이라고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
김지수 저는 운 좋게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고 학교생활을 마칠 수 있었고 집에서 주신 용돈이나 과외 알바로 생활이 매우 쪼들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늘 행복한 건 아니었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늘 우울감에 빠져 있었어요. 지금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좋아서 출판사 취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고시를 보거나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들과 ‘격차’가 벌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함을 느껴요. 경제적인 이유로 불행할 수는 있지만 불행이 모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박지원 힘들어하는 청년 세대를 이야기할 때 불행보다는 ‘불안’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앞으로 뭘 하게 될지 모른다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하는 불안. 전 제 적성이나 성격에 교사가 맞지 않아 임용고시를 보지 않겠다고 벌써 마음먹었고, 비교적 하고 싶은 일도 명확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해요. 3학년이 되면서 친구들은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했지만 전 아직 방송사 시험 준비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연한 자신감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PD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뭘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남지우 저는 이제 대학 새내기이고 취업 같은 현실 문제에 바로 맞닥뜨려 있진 않지만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긴 해요. 마냥 대학 생활을 즐기기엔 조금씩 보이는 현실들이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해요. 지금껏 마냥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이렇게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고건영 불안감은 ‘내가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와요. 우리 사회엔 어떤 ‘매뉴얼’이 분명 있어요. 스무 살엔 대학을 가야 하고, 스물다섯 쯤엔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 하고, 서른이 되기 전쯤엔 결혼도 해야 하고. 그런 정해진 규칙이 ‘안정된 삶’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불안감은 그 매뉴얼의 바깥에서 매뉴얼이 정해 놓은 궤적을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오는 거죠. 저는 또래 친구들처럼 졸업과 취업이라는 매뉴얼을 따르지 않고 있어요. 제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지만 매뉴얼에서 벗어났다는 불안감은 분명히 있죠.
“이 사회에서 ‘카운트되지 않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두렵죠. 불안해요”
경제적 문제를 청년 세대의 불행을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건 ‘꼰대’들의 일방적인 시각이었다.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말들, 그들에게 충고하는 자기 계발서와 어쩌면 운동권 아저씨들의 솔루션도 마찬가지. 청춘의 시기는 무모할지언정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서툴지언정 어리석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불행 대신 불안이라는 말을 선택했고 그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도 지목했다.
박지원 개인의 불행이라는 건 자괴감을 들게 해요.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요.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사회가 그렇게 만든 거겠죠. 정해진 길을 두고 이 길에서 벗어나면 탈락자 취급하고 불안해하게 하고.
고건영 정해진 길, 안정된 매뉴얼이라는 건 보통 수입과 연결돼요.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청년들의 문제이고 가난한 청년들은 불행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사실 핵심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버는 것만 인정하는 ‘정해진 길’이에요. 길 바깥의 삶을 살면 이 사회에서 카운트되지 않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요. 그게 가장 두렵고 불안한 일이죠.
김지수 전 포털 사이트에 ‘26살 여자’를 검색해 본 적이 있어요. 연관 검색어가 많이 뜨더라고요. ‘26살 여자 취업’ 같은 걸로요. 취업을 몇 살까지는 해야 한다는 강박이 누구에게나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주변의 친구 대부분이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아니면 고시 공부를 해서 고위직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출판사에 취직하면 그 친구들하고 계속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죠.
정찬 6년을 만난 여자 친구가 있고,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요. 여자 친구도 저도 호화로운 결혼식 같은 걸 바라지 않아서 최소 비용의 간략한 결혼을 상상해 봤는데 그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 거예요. 당장 결혼은 무리일 텐데 이 역시 ‘매뉴얼’대로는 아니죠.
“불안을 강요받고 있어요”
김지수 사실 청년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경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 안 되는 알바비와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이 수입의 전부거든요. 대단한 금수저가 아니라면 마냥 풍족하게 살 수는 없어요. 그런데 모든 청년이 다 똑같이 고액 등록금과 알바와 취업 부담에 시달린다고 보는 건 사실 조금 과장이죠. 어쩌면 불안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식으로 청년들을 똑같은 잣대로 대하는 건 청년들에게 획일적인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습과 똑같은 거 같아요.
박지원 얼마 전 학교에 교환 학생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어요.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조금 부담스러워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기꺼이 보내 줄 수 있을 만큼 풍요롭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는 중견 기업에서 평균보다는 높은 지위로 일하시는데 그런 아버지도 교환 학생에 드는 많은 비용은 부담스러우신 거죠. 아무렇지도 않게 교환 학생을 가는 친구들을 보면 경제적 격차를 느끼기도 해요. 하지만 반면에 비교적 등록금 걱정이 덜한 절 보면서 그런 차이를 느끼는 친구들도 있겠죠. 그래서 경제적 차이가 오직 행과 불행을 결정하는 건 아닐 거 같아요. 상대적이니까요. 전 그보단 아버지 말씀을 듣고 불안해졌거든요. ‘아버지가 언제까지 일하실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요. 언제까지 아버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아버지를 부양해야 할 거라는 걱정이 ‘매뉴얼’ 바깥의 삶을 더욱 두렵게 만들고 있죠.
고건영 제가 일하는 독립영화계에는 그런 불안이 너무 커요. 언제 입봉해서 영화를 만들지, 그런 날이 오기나 할지 전혀 알 수 없거든요. 독립영화계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얻었다는 감독들도 생활고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고요. 규모가 큰 상업 영화라고 상황이 다르지는 않아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스태프들의 처우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게 ‘시스템’화돼 있거든요. 어쩌면 불안을 증폭시키는 건 그런 시스템이에요. 영화라는 ‘꿈’, ‘희망’을 찾아왔지만 이 시스템에서는 그 꿈과 희망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청년들은 88만 원으로 살아가야 하거나, 삶에서 몇 가지쯤은 포기한 N포 세대가 됐다. 어느 쪽에선 제 밥그릇 챙기느라 바쁜 정규직 어른들 때문에 일자리가 없는 불쌍한 세대가 됐고, 한편에선 철없고 이기적인 ‘아이들’로 낙인 찍혔다. 청년들이 ‘한 것’은 없다. 낙인도 규정도 모두 기성세대가 강제한 것이다. 어느 쪽의 어떤 규정이든 무엇이 다를까.
TV와 신문에 자주 나오는 꼰대들의 말과 말 사이에는 빠짐없이 청년이 들어 있지만 정작 청년들의 삶은 꼰대들의 언어에 없다. 청년들의 삶을 지켜보겠다던 이 기획조차 청년들의 불행을 단지 경제적 궁핍에서 찾으려고 했다. 너무 단순하게.
몇 시간을 두고 진행된 대화에서 모두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합의한 건 ‘불행’보다 ‘불안’이었다. 이 대화의 결과에 대해 청년 시기는 원래 불안한 거라며, 그게 불행한 거라며 또 꼰대질을 하지는 않겠다. 섣부른 분석이나 대책을 조언이라고 내놓지 않길 바란다. 이 글을 읽는, ‘꼰대’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던 이들 모두가. 다만 그들의 불안을 조장하는 현실을 직시하려는 노력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