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생활백서]
글_오진호/사진_정운
오전 흐림, 오후 비. 전날까지 확인한 일기 예보였다. 오전에라도 비가 안 온다니 다행이었다. 기상청에 속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오전만큼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예보를 믿기로 했다. 샌들을 챙겨 나온다는 것을 깜빡했지만 행진이 새벽부터 시작되기에 집에 다녀올 수 없었다. 지독한 발 냄새를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6월 15일, ‘꽃길 100리’ 행진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비는 새벽부터 내렸다. 사람은 비를 맞아도 되지만 상여를 비 맞힐 수는 없었다. 급한 대로 상여 위에 비닐을 얹었다. 폭우가 되지 않기를, 상여가 젖어 파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왠지 착잡했다. 상여를 위해 무엇도 하지 못하는 내가, 행진 말고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우리가, 90일이 넘도록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는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이 원망스러웠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3일 차 행진을 시작했다.
마음은 전달될 수 있을까
‘꽃길 100리’ 행진의 최종 도착지는 양재동 현대차 본사였다. 거대하게 솟은 두 개의 빌딩, 항상 가려져 있는 정문 앞 상징석은 자연스럽게 ‘바벨탑’을 떠올리게 했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 재벌, 자본, 이윤, 노조 파괴 같은 단어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한광호의 죽음 앞에,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절규 앞에 뻔뻔한 저들의 오만은 바벨탑보다 높아 보였다.
그래도 오늘은 양재동 앞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날이었다. 금속노조가 ‘재벌 개혁, 제조업발전특별법 제정,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 2016년 투쟁 승리 금속노조 결의 대회’를 여는 날이었고, 확대 간부, 조합원 3,000여 명이 모였다. 얼핏 행진단의 애절함이 그 3,000명에게 전달되고, 한광호 열사의 상여로 모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대를 믿기로 했다.
행진단이 현대차 본사 앞 비석 앞에 멈췄다. 5월 17일, 분향소가 설치되었던 그 장소에 상여를 놓고, 열사의 분향소를 차리기 위함이었다. 경찰과 용역은 예상했던 딱 그만큼 배치되어 있었다. 용역들 어딘가에 어제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폭행했던 용역들도 있겠지. 대한문의 대통령이었던 최성영(서울지방경찰청 1기동단장, 총경)도 현장에 나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들을 다 몰아내고 멋지게 분향소를 설치하고 싶었으나 상여와 함께 3일을 걸어온 200여 명 행진단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붙어라”
경찰은 행진단을 ‘ㄷ’자 모양으로 둘러쌌다. 금속노조 집회는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분향하겠다고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움직이자 경찰들이 막았다. 이제 내가 기대했던 꽃길 100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믿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속노조 대표단 20여 명만 상여 앞으로 왔다. 그들은 조용히 분향했고, 조용히 사라졌다. 대표단이 사라지자 집회는 종결되었고, 조합원들은 집으로 향하는 버스로 이동했다. 병력 안에 우리는 고립되었고, 상여는 계속 상징석 앞으로 가겠다고 시도하는 아수라장이었다.
“붙어라.” 누군가 외쳤다. 그렇게 듣고 싶던 금속 노동자의 목소리였다. 기쁜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우리를 가로막는 경찰 병력 바깥으로 평화롭게 걸어가고 있는 금속 노동자들이 있었다. 버스를 타러 가던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외친 말이었다. “투쟁”도 아니고, “미안합니다”도 아닌 “붙어라”. 이종 격투기를 구경하듯 무심하게 외치며 지나간 그 노동자의 한마디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행진단 중 일부는 금속 노동자들에게 “이곳에 한광호 열사의 상여가 있다”고 외쳤지만 그들은 그저 행진단을 ‘관람’하며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금속 노동자들이 흩어지는 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금속노조가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 등 주요 조선소 노조들이 구성한 조선업종노조연대는 총 고용 보장 대상에서 ‘물량팀’이라고 부르는 하청 노동자들을 제외했다. 대신 ‘조선 산업 교육 기관’을 설립해 최저임금을 지급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비정규직이 배제된 조선소 구조조정 투쟁과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투쟁과 만나지 못하는 재벌 개혁은 어떤 사회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까. 정규직 고용 안정보다 해고되는 비정규직에게 마음이 가고, ‘공동 교섭’보다 ‘한광호 열사’가 더 절실한 나는 금속 노동자들이 힘 있게 벌여 낼 7월 투쟁에 어떤 연대의 말을 보탤 수 있을까.
격렬한 투쟁이 끝난 직후는 외롭다. ‘꽃길 100리’ 행진이 끝난 다음 날, 괜히 마음이 쓰여 찾아간 저녁 문화제는 권영국 변호사의 거리 강연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거리 강연이 끝나고 몇 명의 발언을 들은 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마지막으로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저녁 문화제를 마무리했다. <금속노조가>였다.
피로써 뭉쳐진 강철의 대오 아 금속노조여
나가자 성벽을 깨고 죽음의 사선을 넘어
노동자 해방의 나라 기필코 쟁취하리라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5년 넘게 생지옥을 견디며 지키는 깃발, 이들이 지켜 온 ‘존엄’은 민주 노조였고, 금속노조였다. MB가 귀족 노동자라 부르던 2011년, 이들은 100만 원도 채 안 되는 월급봉투를 받는 순간에도 <금속노조가>를 불렀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버티며 <금속노조가>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혹시 한광호가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금속노조가>는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른다. 그저 양재동 하나로마트 앞과 지옥 같은 공장 앞에서 결의를 다질 뿐이다. 그렇게 5년이라는 세월을 <금속노조가>를, ‘금속노조 깃발’을 지키기 위해 버텨 왔던 유성기업 노동자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내 어설픈 믿음은 또 이렇게 빗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