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생활백서]
글_재윤/사진_정운
현지 시각으로 지난 6월 12일 새벽 올랜도 LGBT+ 클럽에서 49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다치는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미국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IS와 관련된 범인이 자행한 테러 사건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은 이 사건이 성소수자 혐오 범죄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동성애자 혹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희생되었기에 이 사건을 바라보는 데 있어 혐오 범죄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혐오를 단순히 말로 괴롭히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혐오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기억해야 한다.
나는 사건을 한국 시각으로 13일 새벽 1시쯤 올랜도 인근에서 유학 중인 게이 친구에게 전해 들었다. 범인이 어떤 무기를 사용했고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해 들으며 ‘이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라고 새삼 생각했다. 친구는 그날 사건이 일어난 클럽 인근에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야 사건 관련 뉴스를 들었다고 한다. 친구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이내 자책했다. ‘내가 죽을 수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내가 죽었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으로 바뀌어 버리게 하는 것, 그것이 혐오가 가진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나는 그저 조용히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줬다.
“이 비극이 일어난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말이다. 사건이 일어난 클럽의 이름은 펄스(PULSE). 박동이라는 뜻이다. 2004년에 바바라 포머는 친구이자 공동 창업자인 론 레글러와 함께 올랜도 오렌지 어베뉴에 이 클럽을 열었다. 바바라의 동생인 존은 HIV/AIDS 감염인이었고 투병을 하다가 삶을 마감했다. 바바라는 심장이 뛰듯 사람들이 동생을 살아 있는 것처럼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 클럽 이름을 펄스라고 지었다.
떠나간 사람의 박동을 기억하는 것. 그들이 살았던 자리, 흔적, 기억. 그것을 지금 삶의 자리에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만드는 일은 의미가 있다. 서울에서는 지난 13일과 17일 홍대입구역 인근 경의선 숲길 공원에서 올랜도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두 번의 추모 촛불 문화제가 열렸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회원인 팀 깃즌이 제안한 이 문화제는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주최로 열렸다. 나의 친구이기도 한 팀은 올랜도가 고향이고 한국에서 유학 중인 미국인이다. 문화제가 처음 열린 날 나는 팀과 포옹했다. 팀은 내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지금 포옹이 필요한 시간이야. 아니 포옹은 언제나 필요해”라고 말했다.
포옹이 필요한 시간
그렇다. 성소수자들에게는 포옹이 필요하다. 이런 세상에서 존재하는 우리가 포옹하며 서로의 심장 박동을 나누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다. 언젠가 한 친구가 “내 존재를 존중해 주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숨통이 트일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인식도 많이 변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이 정도면 많이 변한 것 아니냐고, 성소수자가 어떤 차별을 받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성소수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변했나? 정말 그런가?
지난 19일 올랜도 다운타운 이올라 호수 앞에서 5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추모 촛불 문화제에서 테레사 제이콥스 오렌지 카운티 시장은 “나는 오늘 동성애자 커뮤니티 여러분께 말한다. 여러분은 외톨이가 아니다. 여러분은 슬픔과 역경 속에 홀로 남겨진 존재가 아니다”라며 성소수자들을 사회 일원으로 존중하고 위로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1년에 한 번 열리는 퀴어퍼레이드 조차 동성애를 조장한다거나,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나를 내보이는 순간 혐오와 마주하는 세상에서,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지금 내 옆에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 함께 포옹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올랜도 총기 난사 사건을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하다. 한국 언론들은 총기 난사 사건의 장소가 LGBT+ 클럽이라는 사실을 지우고 나이트클럽에 있던 사람들의 비극적인 희생으로만 보도했다. 이처럼 혐오는 때로 표백제와 같다. 성소수자들을 깨끗한 세상에 묻은 얼룩으로, 그 얼룩을 지우는 표백제로 혐오를 당연시한다. 하지만 성소수자는 깨끗한 세상에 묻은 더러운 얼룩이 아니며, 혐오 또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울 수 있는 표백제가 아니다. 혐오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울 수 없다. 그저 성소수자들을 죽게 만들 뿐이다. 혐오가 성소수자의 목을 조를 때 혐오를 함께 막아서고 성소수자와 포옹을 나누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희망한다.
‘나는 이 세상을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 당신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나는 왜 그럴 수 없나?’ 라는 물음의 답은 세상이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성소수자에게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가 거세지는 시절, 성소수자들은 외롭다. 외로운 이들과 포옹하는 따뜻함이 당신에게 있기를 희망한다. 세상이 너무 차갑다면 우리가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 함께라는 말 앞에서 어떠한 차별이나 혐오도 사라지기를 희망한다. 함께라는 희망이 사랑으로 우리가 되어 마주하는 순간, 사랑은 혐오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