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민족은 이슬람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 1930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월러스 파드가 창시한 흑인의 정치적 종교 운동이다. 이들의 교리는 당시 대도시 흑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마커스 가비의 흑인 민족주의와 드루 알리가 이끈 아메리카무어과학사원의 종교적 색채로부터 영향받은 것이었다. 극도로 이단적인 이슬람이었던 아메리카무어과학사원의 일원이었던 파드는 이슬람에 뉴에이지, 프리메이슨, 우생학, 과학소설 내용을 더해 이슬람 민족의 교리를 정립했다. 파드는 교단 내에서 구세주이자 재림한 알라로, 후계자인 일라이자 무하마드는 알라가 지명한 사도로 떠받들어졌다. 이들의 종교는 수니파 이슬람교보다는 모르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종말론적 미국식 종교집단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미국 흑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가 진짜 이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슬람 민족은 최초의 인간이 흑인이었고, 흑인 과학자들이 인종 개량 실험을 통해 태생적으로 사악한 백인을 창조했으며, 억압받는 흑인들을 원래대로 세상의 지배자로 되돌려놓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가르쳤다. 이런 교리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흑인들에게 인종적 자부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흑인이 진짜 유대인이라고 주장한 흑인 교회나 에티오피아 황제를 신으로 본 자메이카 라스타파리 운동의 강조점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전통적인 기독교나 이슬람교를 통해서는 기껏해야 흑백 평등 같은 주장밖에 하지 못할 것이었다. 1975년 일라이자 무하마드가 사망한 후 교단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 워리스는 반백인 교리와 기이한 관습을 폐지하고 교단을 정통 이슬람으로 재편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흑인들이 교단에 매력을 느낀 지점은 차별적 현실에 대항할 용기를 주는 흑인 민족주의였지 모든 인류의 평등 같은 고매한 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워리스에 맞서 전통 교리로의 복원을 주장한 루이스 패러칸이 1987년 결국 승리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인종적 자부심을 가진 이슬람 민족은 단호하게 미국 사회에 대항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인들과 친했던 교단은 FBI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었고, 1942년 징병 거부 선동 혐의로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포함한 고위인사들이 체포당해 수년 간 옥살이를 했다. 교도소에서 이들은 다른 흑인들에게 교단의 지식을 가르치는 데 열중했고, 마약 판매꾼이자 강도였던 맬컴 엑스와 같은 청년들을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이끌었다. 출소한 맬컴 엑스는 거침없는 웅변으로 미국의 위선을 공격하며 대중을 사로잡았고, 교단이 감당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결과 살해당했다. 복싱 챔피언에 오른 후 이슬람 민족의 일원임을 당당히 선언한 무하마드 알리가 베트남 전쟁 시기 징병을 거부한 사건은 미국을 넘어 한국의 신문에도 널리 보도됐다.
▲ 관타나모의 강제 급식 절차를 체험하는 야신 베이 [출처: www.albumi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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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적인 민족주의에서 보편적 인권옹호까지
많은 미국의 힙합 음악인들이 무슬림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소 복잡하다. 루페 피아스코, 큐팁, 알리 샤히드 무하마드처럼 전통적인 이슬람인 수니파 신자가 있는가 하면, 우탱클랜, 빅대디케인, 브랜드누비언처럼 5퍼센트민족(Five-Percent Nations)에 영향을 받은 이들도 흔히 무슬림으로 분류된다. 뉴욕 할렘에서 설립돼 힙합 발전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 5퍼센트민족은 이슬람 민족에서 갈라져 나온 경쟁 조직으로, 이슬람의 용어를 차용하고 있지만 결코 이슬람교가 아니며 조직 스스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힙합 역사상 최고의 래퍼로 꼽히는 라킴은 스스로를 ‘라킴 알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흑인 남성을 신으로 보는 5퍼센트민족의 가르침을 드러내는 별명이지만 유일신교인 이슬람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엄밀한 종교적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힙합 문화 내에 이슬람 민족의 영향이 깊이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맬컴 엑스를 비롯한 이슬람 민족의 주요 인사들은 흑인들을 깨우친 위대한 지도자로 가사에 즐겨 인용된다. 늘 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강조하는 래퍼 커먼은 그저 놀기 좋아하던 자신이 맬컴 엑스와 일라이자 무하마드, 드루 알리를 알고 나서 자유라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특히 이슬람 민족의 단호한 흑인 민족주의 사상은 1980년대 후반 정치적 힙합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88년에 나온 퍼블릭 에너미의 두 번째 앨범은 루이스 패러칸의 주장에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작품이었고, 이후 등장한 모든 힙합 음악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갱스터 랩으로 사회에 충격을 준 N.W.A의 작사가 아이스 큐브도 그 중 하나였다. 큰 인기에도 돈을 벌지 못해 그룹을 탈퇴한 큐브는 퍼블릭 에너미를 찾아갔고, 그들은 큐브에게 이슬람 민족을 소개했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빠르게 흡수했고, 곧이어 힙합 역사상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앨범들을 발매했다. 퍼블릭 에너미와 아이스 큐브는 힙합 최고의 작품들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맬컴 엑 스가 그랬던 것처럼 백인 사회에 충격과 공포를 주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약점도 분명했다. 퍼블릭 에너미의 멤버 프로페서 그리프는 <시온 장로 의정서> 같은 엉터리 반유대주의 문서를 읽고 말을 함부로 한 결과 팀을 떠나야 했다. 1991년 발매된 아이스 큐브의 앨범에는 한국인 가게를 불태우겠다는 ‘블랙 코리아’가 실려 있었고, 가사의 내용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이 래퍼들이 논란을 일으킨 반유대주의나 동성애 혐오는 오래 전부터 이슬람 민족이 비판받아 온 문제들이었다. 이슬람 민족이 흑인 사회에 전투적인 민족주의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블랙 스타의 멤버로 수니파 무슬림인 야신 베이는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줄이기 위한 활동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 민족 신자였고 이후 워리스 무하마드를 따라 수니파로 개종한 인물이었다. 이 이슬람 민족의 아들은 성숙한 무슬림 래퍼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슬람의 유일한 관심사가 인류의 번영이라면 이슬람은 지구 어느 곳에서든 인권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해야겠지요. 할 수 있는 어느 곳에서든 억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스니아나 코소보, 체첸처럼 무슬림이 박해받는 곳이든 시에라리온이나 콜롬비아에서든 말이죠. 사람들의 기본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면 이슬람은 그것에 반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를 이끄는 사람이 되도록 명을 받았으니까요.”[워커스 42호]
[5월호 글에서 언급된 곡들과 관련 영상]
Mos Def(Yasiin Bey) – Umi Says
Yasiin Bey (aka Mos Def) force fed under standard Guantánamo Bay procedure
Anthrax & Public Enemy – Bring The Noise
2Pac – I AIn’t Mad at Cha
http://hiphople.com/subtitle/1466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