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인(성공회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으로 시작한 열흘간의 한반도 정상외교가 사상 첫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6월 말 연이은 정상외교 결과를 토대로 북·미간 비핵화 협상의 물꼬를 트느냐 여부가 하반기 한반도 정세를 좌우할 전망이다.
중국의 중재자 역할(?)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14년 만에 북한을 방문한 시진핑은 6월 20~21일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열고 북·중 친선 관계 강화와 함께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김정은의 입장을 확인했다. 그 내용은 ‘비핵화 의지’, ‘대북제재 완화 및 체제안전 보장 희망’, ‘북·미 협상 재개 의지’, ‘남북대화 기조 유지’ 등으로 요약된다.
이번 북중정상회담에서는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견지하는 것은 북중 관계의 본질적 속성”(坚持共产党领导的社会主义国家是中朝关系的本质属性)이라고 한층 더 강조된 사회주의 연대의식을 표출했다. 이와 함께 시진핑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중국이 적극적인 역할(建設性作用)을 하겠다”라고 밝혔다.
북핵 문제에 있어서 중국이 중국식 해법인 소위 ‘중국 방안(中國方案)’을 제시한 것이다. 기존의 ‘쌍중단(雙中斷)’, ‘쌍궤병행(雙軌竝行)’이 북핵 문제를 관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엔 ‘해결법’을 제시했다. 이는 미국식 ‘제재를 통한 북핵 해결’ 방법을 부정하고 ‘안보 보장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제시한 것과 같다.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을 설득해 판문점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막후 중재자 역할을 했다. 물론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원인으로 지목된 ‘영변+α’의 양보를 받아냈다는 의미가 있다.
북중 정상회담 결과를 보증이라도 하듯이 회담이 끝나자마자 6월 22일 대련-평양 직항노선이 개설됐고, 심천-평양 직항노선도 개설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대규모 관광객이 북한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기업인들의 평양 방문도 빨라지게 된다. 지금까지 평양으로 들어가려면 한 달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앞으로는 며칠이면 된다. 중국 항공기가 평양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 효과가 있다. 연간 8만 명의 인력교류 증가와 약 800억 원의 수출 대체 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대북 제재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미국을 대신해서 중국이 상응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제 미국도 상응조치 내놔야
판문점 회동을 계기로 북미 두 나라 모두 실무협상팀 구성을 사실상 마치는 등 비핵화 협상에 다시 속도가 붙고 있다. 하지만 비핵화 접근 방식과 초기 단계 이행 조치 등 핵심 쟁점을 둘러싼 간극이 여전해 협상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판문점 만남에서 북미 정상은 서로를 워싱턴과 평양으로 각각 초대했다. 평양 혹은 백악관에서 만남이 성사된다면 세계 외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으로 기록되겠지만, 북미 간에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실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북미 정상은 빠른(?) 시일 내에 실무 협상을 재개하는 데도 합의했다. 협상 파트너도 깔끔히 정리했다. 기존의 김영철 전 통일전선부장과 김혁철 대미특별대표가 빠지고 대외 협상 라인을 북한 외무성으로 교체했다. 리용호 외무상을 필두로 최선희 제1부상, 리태성 부상, 권정근 미국 담당 국장 그리고 새로운 대미 협상 대표로 알려진 김명길 전 베트남 대사까지 대미외교 진용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험난한 여정이 예상되는 실무협상을 어떻게 끌고 갈지 주목된다.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비핵화와 보상 방법론은 이른바 ‘단계적 동시행동의 원칙’이다. 비핵화와 상응조치를 낮은 수준부터 하나씩 합의해서, 각 단계별 이행이 성공할 경우 다음 단계로 나가자는 주장이다. 북한이 하노이 회담 당시 영변 핵 시설 폐기와 2016년 이후 채택된 5가지 유엔 대북제재 해제를 고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북한이 주장하는 단계별 이행은 1단계에서 미래 핵에 해당되는 핵실험이나 미사일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로 영변 또는 주변 시설들을 폐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나 탄도 미사일의 폐기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미래 핵과 현재 핵을 다루려면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15년까지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기간 동안 북한은 계속해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동시 병행 원칙’을 주장하고 있다. 즉, 북한의 초기 비핵화 조치만 합의에 포함시키는 게 아니라 당장 이행하지 않더라도 폐기 대상이 총 망라된 최종 목표 지점을 미리 합의해 두자는 입장이다. 트럼프가 판문점 회담 후 서두르지 않겠다며 ‘포괄적인 좋은 합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재개될 실무협상에서는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합의’ 사이에서 양측이 얼마나 유연성을 갖고 협상에 임하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모습을 내비치면서 북한과의 대화 진전에 계기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새 협상에서 미국이 “북한 핵의 폐기가 아닌 동결에 만족할 수도 있다”는 〈뉴욕타임스〉의 7월 1일 보도에 이어, 미국 실무협상팀을 이끌고 있는 비건 대북특별대표도 북핵 동결을 1차 목표로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자신이 강조했던 ‘유연한 접근’의 실체를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비핵화로 가는 중간 과정에서 미래 핵의 포기를 의미하는 핵 동결을 이룬 뒤에 완전한 비핵화로 나아가겠다는 협상 전략으로 해석된다.
다만 북한이 핵을 동결해도 제재 해제는 없으며, 대신 인도주의적 지원, 인적 교류 확대, 평양 연락사무소 개설 등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비핵화 이전의 제재 유지 원칙을 지키되 신뢰 회복 조치 등을 통해 단계별 보상을 줄 용의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변수는 제재 해제 없는 비핵화 협상에 북한이 얼마나 호응할지다. 비건 대표가 언급한 상응조치는 이미 하노이 담판 이전부터 거론돼온 것이어서 새롭지 않다. 그래서 북한이 ‘영변+α’를 내놓을 의지를 접을 수도 있다. 게다가 아직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것도 실무협상이 늦어지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북미대화는 곧 시작되겠지만 문재인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자율성 부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율성이 부족하다 보니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역할을 못하고 있다. 미국이 남북관계의 독자적 진전에 제동을 걸었던 탓도 있지만, 문재인 정부가 미국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면서 스스로 자율성을 잃어버린 측면이 크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비핵화 협상과 남북관계의 선순환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대북제재 틀 속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기조로 인해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혔다. 비핵화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출범한 한미 워킹그룹은 남북 협력 사업을 승인하는 창구가 됐다. 대북 제재 하에서도 가능한 남북관계 사업들조차 미국을 의식하는 바람에 판문점선언 합의 이행이 상당부분 지체됐다.
문재인 정부는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시설점검 방문이 제재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미국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지연시켰다. 또한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에게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 재개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비핵화 목표 달성 전까지 대북제재를 완화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확고한 원칙만 확인했다.
이러한 태도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북한의 신뢰저하로 이어졌고 한국의 중재역량을 약화시켰다. 북한은 처음부터 북미대화의 진전여부에 따라 남북관계를 발전적으로 진전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의 발전적 진전에만 초점을 맞춰 미리 결과를 예상케 했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북한은 문재인 정부에게 수차례에 걸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2019년 들어서 남북 간 정식 분과회담은 한 차례도 열리지 못했고, 2019년 3월 말에는 3일 만에 끝났지만 개성 공동연락사무소에서 북측 인원을 일방 철수시키기도 했다.
대남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7월 14일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라는 글에서 “미국 눈치를 보면서 북남관계 문제를 조미(북·미) 협상 진전 여부에 따라 추진하겠다고 하는 남조선 당국의 태도는 평화번영에 대한 희망으로 밝아야 할 겨레의 얼굴에 실망의 그늘을 던지고 있다”며 “친미 사대적 근성의 발로로서 민족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다는 북남 선언들의 근본정신에 대한 부정”이라고 비난했다. 남측이 한·미 공조와 대북 제재의 틀 내에서 남북교류를 추진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¹
그 동안 문재인 정부는 미국을 선택했고 자신의 선한 의지와 진정성을 북한이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적 관점과 평화통일이라는 일국적 관점으로 접근했고, 한미관계는 동맹이라는 제국주의 관점으로 접근했지만 결국 제국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눈치를 보고 미국의 재가를 받아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문재인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 그리고 남한의 우월의식에 대해서도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북한의 저임 노동력을 운운하거나 소위 ‘한반도 운전자론’을 당당하게 내세우면서 남한의 주도적 역할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인식의 오류와 착각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남한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의 경제적 지원으로 북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면에는 북한의 경제적 수준을 높여서 통일을 하는 것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합리적 방식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북한은 어느 나라에 의존하는 외교를 펼치지 않는다. 다만 상호 간 신뢰와 역할 관계가 형성됐을 때 특별한 관계로 존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독자성이 대두된 것이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와 트럼프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국가이익을 가장 기본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등장은 한국사회에 기존의 관계와 관념을 모두 바꿔버렸다. 과거에는 미국의 민주당이 현재의 더불어민주당 계열과 선택적 친화력을 보여줬고, 미 공화당은 현재의 자유한국당 계열과 같은 관계를 지녔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들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와 재선을 기원하는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기본적으로 정책적 차이가 크지 않고 이들은 모두 자국의 이익을 늘 우선시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한미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사유해야 하는지 인지해야 할 부분이다.
1) <경향신문>, 2019. 7. 15
<참고자료>
배성인,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 평가와 과제.” <진보평론> 80호, 메이데이, 2019.
이성현, “판문점 북미정상회담 이후 중국의 북한 외교에 대한 전망.” <정세와 정책> 2019-6호, 세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