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관/ 참세상연구소(준). 《부채 전쟁》을 함께 지었고 참세상 주례토론회를 기획하고 있다. / 사진 정운 기자
‘한국판 양적 완화’ 논쟁
공천 사태로 시작해서 큰절 정치로 마무리된 이번 총선은 정책 면에서 최악의 선거로 평가된다. 그런데 정책이 실종된 이번 총선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볼 만한 이슈가 있었다. 바로 양적 완화이다. 다른 정책들을 제쳐 두고 왜 갑자기 양적 완화가 논란을 부르게 된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적 완화 정책을 오로지 미국을 비롯한 기축 통화국들만 취할 수 있는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 양적 완화를 해야 한다고 하니, 그 실현 가능성과 부작용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논쟁이 불거졌다. 당시 새누리당이 제기한 ‘한국판 양적 완화’에 대해 김종인 더민주당 대표가 “부자들 돈 퍼주기”라고 비판하면서 양적 완화가 한때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강봉균 새누리당 선대위원장은 라디오에 출연해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후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이 다 양적 완화를 했다”며 “김 대표는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는 양반”이라며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4년 전 서로 다른 진영에서 경제 정책을 주도했던 이들이 이제 서로를 힐난하는 모습을 보면 사뭇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양적 완화 정책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 구도로 볼 문제가 아닐 성 싶다. 그러나 역시 진지한 논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선거 속 진영 논리에 묻혀 비판을 위한 재료로만 쓰이다 끝나고 말았다. 더구나 이 정책과 가장 밀접한 공공 기관인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는 매우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여당과 사전 정책 공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수 및 수출 경기가 급감하고,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제한적 수준의 ‘한국판 양적 완화’는 다시 거론될 수도 있다. ‘한국판 양적 완화’는 이미 시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양적 완화 정책이 무엇이고, 이것을 둘러싸고 어떤 갈등이 벌어지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정세 변화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따져 봐야 한다.
2008년 금융 위기와 양적 완화, 중앙은행의 전면적 시장 개입
‘양적 완화’는 무엇을 양적으로 완화한다는 말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자산이 있어야 한다. 보통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국가가 세금으로 걷은 조세와 둘째는 국채, 금, 외환(달러)을 비롯한 금융 자산들이다. 가령 100억 만큼의 화폐를 중앙은행이 발행한다면, 이 발권력은 그에 상응하는 100억 만큼의 중앙은행 자산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 것이다. 일종의 약속 체계이다. 양적 완화라는 것은 바로 이것, 중앙은행 자산의 양을 완화, 즉 늘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중앙은행은 늘어난 자산에 상응하는 만큼 화폐를 발행한다. 화폐가 만들어지는 과정엔 이런 규칙이 숨겨져 있다. 흔히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 불리는 규율은 이런 화폐 발행의 규칙하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런데 이런 규칙이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 무너졌다. 금융 위기의 진원지였던 미국 중앙은행이 금융 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파생 금융 상품을 비롯한 부실 채권 등을 대거 매입했던 것이다. 당연히 엄청난 돈이 금융 시장에 흘러들어 갔고, 이것이 부실 금융 기관들을 살렸다. 치명적인 은행 위기를 넘기기 위한 긴급 조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양적 완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차 3차 계속 확대되었다. 그러면서부터 양적 완화의 성격이 달라졌다. 미국의 1차 양적 완화가 금융 시스템을 살리기 위한 극단적 조치였다면, 2, 3차 양적 완화는 경기 부양을 위한 상시적 통화 정책이 된 것이다.
2, 3차 양적 완화 기간 중 미국 중앙은행은 시중 금리를 하락시키기 위해서 이에 영향을 주는 10년 이상 장기 국채를 매입했다. 한편 이로 인해 미국 정부는 국채 발행의 이자 비용을 현저히 낮출 수 있게 돼, 간접적으로 재정 보조를 받기도 했다. 공공 기관 채권 매입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다.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주택 시장을 부양하기 위해 미국 중앙은행은 MBS(Mortgage Backed Securities, 주택 저당 증권)도 대량 매입했다. 이로써 실질 금리가 0%까지 떨어지는 효과를 봤다. 미국 주택 시장은 2013년을 지나면서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런 중앙은행의 양적 완화를 미국뿐 아니라 유럽, 일본, 영국 등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모두 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 은행은 회사채와 주식까지도 매입하고 있다.
이로써 중앙은행은 시중 은행들의 은행으로서 ‘최종 대부자’라는 전통적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각종 금융 상품에 대한 ‘최초 구매자’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이다. 심지어 현재는 제로 금리 정책을 뛰어넘어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선보이며 뜨거운 논란을 부르고 있다. 이처럼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벌어진 세계 중앙은행들의 자산 매입과 초저금리 정책은 일상화되었다. 이것은 중앙은행이라는 국가 기구의 전면적 시장 개입이 일상화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매달 미국을 비롯한 일본, 유럽, 중국의 중앙은행장들의 기자 회견과 회의록 발표에 전 세계 매스컴이 주목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미 시행 중인 한국판 양적 완화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현재 한국은행은 수출입 은행의 지분 13.2%를 보유하고 있는 2대 주주이다. 즉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수출입 은행의 자금을 대 주고 있는 것이다. 산업은행의 경우 정부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지만, 앞서 설명한 화폐 발행의 규칙에 따르면 광의의 정부라 할 수 있는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산업은행 자금을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주장했던 ‘한국판 양적 완화’의 핵심도 사실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산업은행의 기업 구조 조정 자금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도 “기업 구조 조정을 활성화하기 위해 산업은행 등에 대해 선택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형 양적 완화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한국은행 노조는 “정치가 통화 정책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중앙은행 독립성의 중대한 훼손이며 이는 가능하지 않고 있어서도 안 된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쟁점의 핵심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아니다. 이미 ‘한국판 양적 완화’라 부를 만한 조치들은 수년 전부터 시작됐다. 보통 중앙은행은 시중 은행을 비롯한 굵직한 금융 기관들과만 거래한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시중 은행이라는 징검다리를 거쳐 민간에 자금을 공급한다. 한국은행과 시중 은행 간의 자금 거래에 사용되는 금리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준 금리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은행은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20조 원 규모의 ‘금융 중개 지원 대출’ 제도를 금리 0.5~1%에 운영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시중 은행에 1.5%의 기준 금리보다도 훨씬 낮은 금리로 별도의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만큼 시중 은행들은 중소기업 대출 금리를 낮출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자금의 혜택을 받는 중소기업들은 시중 금리보다 훨씬 낮은 금리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결국 가운데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시중 은행을 빼고 보면, 0.5% 금리에 발행한 중소기업의 회사채를 한국은행이 산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미 한국은행은 2014년부터 주택금융공사에서 발행하는 MBS를 매입 대상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안심 전환 대출과 같은 주택 대출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함이다. 그 방법은 한국은행이 주택금융공사에 4000억 원을 추가 출자해서 주택금융공사가 MBS를 발행할 여력을 만들고, 추가 발행된 MBS를 한국은행이 매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은행은 발권력을 바탕으로 주택금융공사에 정책 금융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한국은행의 가계 부채 대책 구조”라 부르기도 했다.
이로 볼 때, 양적 완화를 둘러싼 핵심 쟁점을 중앙은행의 독립성 훼손으로 보는 것은 매우 좁은 시각이다. 원래 중앙은행의 역사에서 이 독립성의 의미는 ‘정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정부 내에서의 독립’이었다. 그러므로 경제 상황으로 인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정책은 언제든 취할 수도 있고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조치이다.
문제는 그렇게 동원한 발권력을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다. 핵심은 바로 여기다. 이런 발권력을 이용하는 ‘한국판 양적 완화’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미 지난해 여름 이슈화된 바 있다. 이일형 대외경제연구원장이 “내수 진작을 위해 ‘양적 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기준 금리 조정 정책으론 한계에 직면했으니 중소기업과 가계의 빚을 탕감해 줘서 국내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자”고 지적하면서 매입 대상 채권으로 중소기업 대출(약 10조 1000억 원)과 은행권 가계 대출(약 3조 1000억 원), 제2 금융권 부실 채권(약 14조 1000억 원), 햇살론 등 서민 대출 채권(약 12조 4000억 원)과 현재는 정상 채권이나 부실 채권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큰 채권(약 19조 3000억 원) 등 모두 60조 5000억 원 규모를 거론했다. 이런 주장이 현실화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한국은행이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프로그램 자금 지원과 주택 시장 부양을 위한 MBS 매입을 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전혀 논의되지 못할 사안은 아닌 것이다. 강봉균 새누리당 선대위원장의 제안은 설익긴 했지만 단순한 선거용은 아니며 부분적으로 표출됐던 양적 완화 논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려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중앙은행은 누구를 위해 돈을 풀어야 하나
우리가 이에 현명하게 응수하는 방법은 부자들을 위한 ‘돈 풀기’가 아닌 서민들을 위한 ‘돈 풀기’를 위해 한국은행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가령 시중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해 제2 금융권의 고금리 대출에 의존하고 있는 서민들을 한국은행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얘기해야 한다. 언제까지 연예인들을 동원한 TV 속 대출 정보에 서민들의 생계를 의탁해야 한단 말인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은 생산적이고, 고금리에 수탈당하고 있는 300만 한계 채무자에 대한 지원이 비생산적이라는 주장은 경제적으로 틀린 얘기다. 20~30% 고금리 속에선 어떤 우량 기업이라도 바로 한계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핵심 쟁점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누가 독점하고 있고, 누구를 위해 이 발권력을 동원하는가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는 중앙은행이 매입한 자산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자산은 그 화폐 공동체 구성원들의 경제력과 생산력을 기초로 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중앙은행의 어마어마한 발권력은 사실 우리 모두가 미래에 만들어 낼 사회 경제적인 풍요로움에 기댄 것이다.
화폐 주권은 그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 화폐에 대한 접근권은 현저하게 불평등하며, 계급별로도 차등적이다. 금융 위기가 터지면 대형 은행들과 대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논리가 마치 불가피한 것처럼 회자되어도, 300만 한계 채무자들에게 달라붙은 ‘도덕적 해이’라는 딱지는 여간해선 떼기 힘들다. 화폐에 대한 배분 규칙을 어느 한쪽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지속된 전 세계적 양적 완화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이 더욱 심화하고 있는 현 상황은 화폐 권력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기울어져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제 우리는 돈을 어떻게 배분해야 옳은지, 그 규칙을 새롭게 세워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가 양적 완화 논쟁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규칙엔 어떤 것이 있을까?
(계속)
(워커스 6호. 2016.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