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PC)’보다 변화를 선택한 미국
[워커스 26호]트럼프 지지로 밀려온 미국 노동자
김선철(에모리대 한국학/사회학)
상상도 못 했던 일이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투표 마감 후 8시 넘어까지 85%로 힐러리 클린턴의 우세를 점쳤던 뉴욕타임스는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하기 시작했다. 개표방송을 하는 미국 유력 방송사 진행자들도 넋을 잃은 모습이 역력했다. NBC의 개표방송 진행자 중 한 명이었던 크리스 매튜는 연신 머리를 저으며 “Jesus”를 읊어댔다. 클린턴뿐만 아니라 트럼프 진영에서도 예측하지 못했던 승리였다. 예측 가능성을 생명으로 삼는 주식시장은 이 소식에 요동을 치며 하락했고 전 세계로 타전된 뉴스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렇게 미국인은 자신의 선택을 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좌우를 막론하고 선거전 대부분 여론조사가 힐러리 클린턴의 3~5% 우세를 점쳐왔던 상황이라 쇼크의 강도는 그만큼 더 컸다. 트럼프 당선을 상상도 못 했던 클린턴 지지자들은 대선 결과에 거리로 나섰고, 주요 언론사들은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따져보는 기사들을 뒤늦게 내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뉴욕타임스는 이례적으로 신문사와 편집부의 이름으로 선거결과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약속하는 편지를 독자들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미국 내 주류 언론과 분석가들은 미국사회의 인종적 인구 구성이 급변하고 다양성의 문화가 확장하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언설과 선거 전략이 시대착오적이라 굳게 믿었다. 필자도 지난 호의 글에서 다양한 여론조사 결과에 기반을 둬 여성과 소수자를 배제하는 트럼프의 선거 전략은 이길 수 없는 전략이라 단언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런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 글에서는 선거결과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는 두 가지 입장을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백인의 반격
클린턴 패인과 관련해 가장 큰 호응을 얻는 분석은 이번 선거가 지난 8년간 흑인 대통령에 대한 혐오를 키워온 ‘백인의 반격(white-lash)’이라 보는 입장이다. ‘백인 반격론’의 논리는 무엇보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쉼 없이 터져 나왔던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발언에 주목한다. 미등록 이주자를 범죄인과 등치하고, 멕시코와의 국경 따라 10미터가 넘는 벽을 쌓겠다거나, 무슬림의 입국을 금지하겠다는 식의 약속이 그동안 숨어있던 백인의 인종주의 경향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 확정 이후, 미국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왔던 인종주의 혐오 발언, 무슬림에 대한 위협과 폭력(미네소타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유학생이 백인에게 맞아 죽는 사건도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도 이런 인식의 배경이 됐다.
공식 출구 조사 결과도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듯 보인다. 미국의 유색인종은 74:21의 비율로 클린턴을 지지했으나, 전체 유권자의 69%를 구성하는 백인은 37:58로 트럼프를 더 많이 지지했다. 이 주장에 더 힘을 싣는 것은 젊은 층과 백인 여성의 투표성향이다. 줄줄이 이어진 트럼프의 여성혐오 발언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은 10% 차이로 트럼프를 더 지지했고(43:53), 편견에서 자유롭고 평등의식이 강할 것으로 인식되었던 18~29세 사이의 젊은 백인층도 43:48로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더 컸다. 인종적 균열이 명백해 보이는 지점이다.
이런 접근은 대선을 전후한 인종주의 발언과 폭력의 증가에 대해 쉬운 답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다. 하나는 백인의 높은 공화당 지지 경향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4년 전 공화당 미트 롬니 후보에 대한 백인 지지율은 트럼프의 58%보다 높은 59%였다. 이와 동시에 고려할 것은 유색인종의 클린턴 지지가 오바마 때에 비해 줄었다는 점이다. 클린턴은 흑인과 라티노들부터 각각 88%와 65%라는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이는 4년 전 오바마가 받았던 93%나 71%에 비하면 상당히 줄어든 수치다. 이런 현실에서 백인의 트럼프 지지를 단순히 인종주의 탓이라 낙인찍는 것은 쉬운 답은 될지언정 제대로 된 분석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노동계급 간과론
이 맥락에서 보면 클린턴 패배가 2008년 경제위기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고통 받는 (주로 백인) 저소득층과 노동자 계급을 껴안지 못한 탓이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런 접근은 과거 오바마를 지지했고 선거운동 기간 내내 클린턴이 우세를 보였던 미국 중서부 주들이 트럼프 지지로 돌아선 것에 주목한다. 선거전문가 네이트 컨의 분석이 이를 가장 뚜렷이 드러냈는데, 그가 제시한 지도를 보면 아이오와, 위스콘신, 미시건,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과거 자동차, 철강 등 전통적 제조업의 중심지였던 중서부 주들에서 트럼프로 갈아타는 현상이 더 강하게 드러났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자유시장 만능론을 펼치는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이 같은 ‘노동계급 간과론’이 백인 반격론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노동계급이 주로 백인 노동자를 지칭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에서는 백인 반격론과 노동계급 간과론이 상호 배치되는 양 감정적인 논쟁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이유는 패배의 책임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즉 누구에게 손가락질 할 것인가의 문제와 밀접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백인의 인종주의를 손가락질하면 되지만, 후자의 경우 클린턴의 선거 전략과 정책의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기 때문이다. 실제 마지막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이들 지역에서 유세를 벌였던 트럼프와는 달리 클린턴은 이들 지역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에는 클린턴과 노동자 사이의 간극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의 노동자 문화 연구자들은 미국 노동자가 자신과 직접 부대끼지 않는 부자들은 선망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매니저로 상징되는 소위 엘리트/전문가 집단은 오만한 기득권층의 상징으로 본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클린턴은 이런 엘리트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진다. 안 그래도 40% 내외의 비호감도를 보이던 클린턴이 월스트리트의 금융 엘리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점, 그래서 골드만삭스에서 한 시간 강연하고 보통 노동자들이 몇 년을 뼈빠지게 일해야 겨우 받을 3억 원이라는 큰돈을 받았다는 점, 게다가 규칙을 어기고 사적인 서버와 핸드폰을 통해 공적인 이메일을 주고받은 점 등은 규칙을 지키며 힘들게 일해 온 많은 노동자에게 너무도 큰 분노의 대상이 됐다.
주류의 억압적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거부
이처럼 인종주의와 경제문제를 축으로 진행한 논쟁은 결국 백인의 집합적 정체성 표현과 경제적인 문제들이 맞물리면서 선거의 향방을 결정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는 이번 대선 기간 유독 강력하게 표출됐던 ‘정치적 올바름(PC)’의 담론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2000년대 접어들며 성적, 인종적, 계급적 약자에 대한 배제와 억압을 거부하려는 PC문화는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주류가 돼버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통적 가족 형태를 중시하고 일자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다수 백인은 PC문화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런 경향은 학력이 낮고 시골에 살수록 더 강했다.
문제는 주류사회가 또다시 PC 담론을 동원해 이들의 문제 제기를 시대착오적이고 무지몽매한 것으로 조롱하고 멸시해왔다는 점에 있다. 특정 사회집단을 주변화, 배제, 억압하는 문화를 거부하기 위한 PC 담론이 거꾸로 백인에게는 억압기제로 느껴졌다. 선거 막판 클린턴이 민주당 기부자들과의 만찬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을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반환경주의자로 규정하며 ‘한심스런 무리들(basket of deplorables)’이라 불렀던 것과 이에 대한 강한 반발은 이런 현실의 한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대선 직후 불거진 백인 우월주의의 위험한 커밍아웃도 이런 억압심리를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PC문화의 버블 속에서 사는 지식인 전문가 집단은 바로 이러한 중요한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유무역협정과 이민자들이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주범이며, PC담론이 리버럴들의 억압기제라 선포하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트럼프의 슬로건은 점점 더 많은 지지자를 규합해 갔다. 반면 클린턴은 구체적인 수준에서는 트럼프와 비교도 안 되는 정교한 경제정책을 내놓았음에도 결국 기존 체제의 연장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런 가운데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던 많은 백인 유권자는 트럼프를 최선은 아니지만 적어도 클린턴이 대표하는 ‘현 상태’보다는 나은 선택지로 보았다.
트럼프 지지로 밀려온 미국 노동자
이런 분석은 이번 대선이 정치적 올바름보다는 변화를 추구했던 중간 부동층에 의해 결정됐음을 보여준다. 변화에 대한 염원의 발원지는 문화와 경제의 교차점, 즉 PC문화로 대변되는 도시 중심의 고학력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과 신자유주의 세계질서가 초래한 경제적 궁핍감과 불안감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신자유주의 질서의 일부인 클린턴이 PC담론으로 무장해 도덕적 설교를 하는 꼰대였다면, 트럼프는 하는 말과 짓이 어딘가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기존의 문화적, 경제적 시스템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후보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점 때문에 미국 제도정치권에서 좌파 군을 형성하고 있는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렌과 버니 샌더스는 차별적/인종주의적이거나 반환경적인 트럼프의 정책에는 명백한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도, 환태평양자유무역협정(TPP) 탈퇴 등 일자리를 보장하고 미국 서민과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할 수 있는 정책에는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천명하기도 했다.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한다는 입장에는 동의하면서도 민주당과 클린턴이 전통적인 미국의 노동계급을 저버렸다는 무언의 비판인 셈이다. 극단적인 정치가 양극화된 미국에서 이런 입장표명은 다수 클린턴 지지자들의 분노 섞인 항변을 불러왔다. 정치적 양극화의 조건에서 이들의 입지도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런 정치적 양극화가 담론과 문화의 양극화를 야기하면서 많은 미국인을 트럼프 지지로 밀어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었던 지점은 물론 미국 대선을 둘러싼 수많은 조건과 과정 일부에 불과하다. 미국 리버럴/진보세력 내 인종과 계급에 관한 논쟁은 한국에서 80년대 진행됐던 민족과 계급의 논쟁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며 치열하게 논쟁 됐고,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에 더해 지방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가지는 미국의 연방제 시스템과 대선 선거인단 제도 등 법제도적인 측면이 이번 대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도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대선 결과를 문화와 경제의 교차지점을 통해 살펴보고자 했던 것은, 다양한 균열이 공존하는 오늘날 정치의 매우 중요한 고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굳이 그람시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모든 정치적, 경제적 투쟁은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다.[워커스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