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가 뭐 어쨌다고?
오승은 / 《자본론》 공부 모임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인터넷 은어로 시작해 최근 항간에 퍼진 ‘수저 계급론’을 잘 들여다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장면이 건져진다. 이제 성공한 사업가나 연예인은 대중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자신이 부잣집 자제가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재벌 2, 3세의 후안무치는 감당 못 할 공분을 몰고 오고, 반면 음원 성적이 좋은 힙합 가수가 돈 자랑을 하면 젊은 층은 경멸이 아닌 ‘리스펙트’로 화답한다. 이러한 장면들로 보자면 지금의 수저 계급론은 불평등한 경제 구조에 대한 비관 내지는 분노를 담고 있는 한편 그 이면에는 자수성가형 부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자리하고 있단 감상이 든다.
타고난 자산 없이 맨손으로 부를 일군 사람을 가리켜 흔히 자수성가를 했다고 한다. 개인의 힘만으로 부를 쌓는다는 판단엔 이론의 여지가 많지만 일단은 상속의 반대말로 용인해 보자. 실제로 한국이 수저 계급 사회라는 진단은 상속형이 자수성가형 부자를 압도한다는 항목을 중요하게 포함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도 속속 제출되었다. 한국의 10억 달러(약 1조 원) 이상 자산가 가운데 상속자 비율이 세계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는 한 보고서 내용이 그랬고, 세계 400대 부자 명단에 오른 한국인 5명이 모두 상속으로 자산을 증식했다는 또 다른 발표가 그랬다. 가로수길 건물의 1/3 이상이 상속·증여된 것임을 알리는 방송 화면은 3년째 그림 파일로 인터넷을 떠돈다. 처방은 달라도 이러한 자료들이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산 불평등이 문제란 인식이 생겨난 게 최근의 일도 아니고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내건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슬로건은 어렴풋하게나마 지금의 수저 계급론에 깔린 감성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2014년 《21세기 자본》으로 일약 스타가 된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는 세계적으로 소수의 자산가에게 부가 집중되는 오늘날의 경제 체제를 실증하고 이를 ‘세습 자본주의’라 불렀다. 그는 자산 수익률을 낮추지 못하면 자본주의가 끝장날 것임을 암시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조세·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어쩌면 이때만 해도 자산 불평등에 대한 불만의 저변은 넓었고 그 에너지의 향방도 미지수였다.
그러니 수저 계급론의 에너지를 놓고 노선 정리를 하려는 목소리들이 나온 것도 이상하지 않다. 예컨대 “신흥 부자들이 태어나 성장할 수 있도록 … 수저 계급론에 얽매이지 않고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을 한층 높”이자든가
(“자수성가형 억만장자가 등장할 토양 키워야”, <서울신문>, 2016.3.15.), “‘금수저’를 역전시킬 수 없는 자본주의는 봉건주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 우리 젊은이들에게 열정과 패기가 없다고 혀를 차기 전에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 줘야 한다”(“미국의 청년 자수성가”, <조선일보>, 2016.1.11.)는 보수 언론의 글귀는 수저 계급론을 계층 이동 가능성의 문제로 못 박으며 신흥 부자의 등장을 염원하는 굿판에 가져다 쓰고 있다.
그런데 자수성가형 부자가 많은 사회는 과연 공정한 사회인가? 자수성가가 대세라는 미국을 보자. 1990년대 말 ‘닷컴 버블’을 거치며 미국은 바야흐로 창업형 억만장자들의 시대를 맞았다. 이제 미국의 부자 명단은 그냥 자수성가도 아니고 30대 이하 자수성가 IT 창업자들만으로도 하나가 꾸려진다. 페이스북 창업자 저커버그가 가장 유명하지만 신흥 강자는 ‘공유 경제’의 쌍두마차인 에어비앤비와 우버의 창업자이다. 우버(‘차량 공유’ 중개 업체)와 에어비앤비(‘빈집 공유’ 중개 업체)는 생산 기지가 필요 없는 소프트웨어 운영의 특성상 사업 계획이 투자자들의 눈에 들자마자 세계 대도시들로의 진출과 확장을 빠르게 추진했다. 불법 논란이 불거지면 창업자와 투자자가 똘똘 뭉쳐 공유 경제가 지역 사회의 안전, 편의, 고용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린다고 강변했다. 에어비앤비가 뉴욕 낙후 지역에서만 95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든가, 뉴욕의 우버 기사들이 연 수입 9만 달러를 올린다는 홍보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공유 경제가 선사한다는 이러한 선물에 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왜일까?
우버와 에어비앤비는 주식 상장을 하지 않았다. 소위 공개된 기업이 아니다. 그러니 수익 보고도 공인 회계 감사도 없다. 공익에 기여한단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알고리즘과 데이터 역시 비공개이거나 극히 선별적·배타적으로만 제공된다. 그들의 자화자찬이 독단적 주장들로 가득 차 있다고 의심받는 이유다.
그런데도 지금껏 이들의 투자 라운드는 성공 일색이었다. 현재 평가되는 우버와 에어비앤비의 기업 가치는 각각 650억과 250억 달러로 알려졌으며, 이는 무려 주요 자동차 제조 업체들과 비슷하고 호텔 체인 업체 메리트를 넘어서는 수준이다(물론 벤처 기업의 가치 평가 셈법은 상장 기업들에 비해 훨씬 주관적이다. 가령 한 벤처 자본가가 10%의 지분 소유에 합의하며 10억 달러를 투자했다면 남은 90%에 대한 투자가 실현되지 않더라도 그 기업의 가치는 100억 달러로 평가된다).
두 기업에 투자가 몰리는 근거는 무엇일까? 실적? 비공개일뿐더러 심지어 에어비앤비는 지난해 1억 달러 이상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네 거는 내 거: 공유 경제에 대한 반론》의 저자 톰 슬리는 공유 경제 투자자들이 규제 환경이 완화돼야지만 주식 공모 시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으며, 그 완화는 “신기술에 친화적인 수준이 아니라 우버와 에어비앤비의 특정 사업 모델을 떠받칠 수준”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유 경제 투자금은 혁신적 기술 자체보다는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에 걸린 판돈에 가깝다. 그 판돈이 현재 창업자들의 자수성가 신화를 떠받치고 있는 격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니 두 기업의 중요한 인사 영입과 지출은 모두 로비와 홍보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지난해만도 우버는 도로 내 차량 수를 제한하려는 뉴욕 시의 계획을 무산시켰고, 에어비엔비는 샌프란시스코의 단기 주택 임대 제한 법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광고 물량전을 펼쳤다. 공유 경제의 성공이 규제 완화에 의존하는 상황에 대해 미국 《네이션》지의 더그 헨우드는 “이러한 붐에도 철학이 있다면 그건 바로 ‘교란’”이라고 꼬집는다. 물론 이 교란에 대해 우리는 2014년 서울시의 우버 영업 금지 결정을 두고 각종 전문가연하는 자들이 훈계했듯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를 떠올리도록 강요받았다.
한국에서도 창조적 파괴의 기수들이 육성돼야 한다는 목소리 역시 계속 커졌다. 예컨대 강정수 디지털사회연구소 소장은 미국의 주축 산업이 디지털 경제로 이동했으며 이 부문에선 “엔지니어가 노동 생산성을 주도”한다고 거침없이 선언했다(“‘디지털 경제’ 글로벌 각축전, 한국의 선택은”, <경향비즈>, 2016.1.9.). 이처럼 본사에 직접 고용된 엔지니어들만으로 노동 생산성을 운운하는 건 현대자동차의 노동 생산성이 R&D 분야에서만 나온단 주장만큼 이상하다. 아이폰의 조립 공장이나 우버 기사들의 운수 노동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신기술을 개발한 자본가들이 노동 조건 문제를 외면하면서도 노동 생산성 타령을 하는 건 물론 익숙한 광경이다. 1990년대 말 미국의 인터넷 기업 붐 당시에도 디지털 신기술 덕분에 노동 생산성이 커지고 심지어 경기 순환이 사라질 거란 낙관이 전문가들 사이에 팽배했다. 이 낙관이 일찍 끝났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대공황 직전에도 그랬듯 자본가들과 그 동맹 세력은 영원한 팽창을 꿈꾸며 이처럼 허황된 말을 해야만 하는 숙명에 있으니 말이다.
디지털 경제의 장밋빛 전망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당장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의 덫에 빠진 미국 우버 기사들의 모습이다. 우버 기사들은 개인 소유의 자동차를 우버 본사에 ‘공유’당하고 차량 유지·주유·보험 등의 비용을 홀로 감당하면서도 별점 평가 알고리즘에 따라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 본사는 이들의 영업에 결정적인 동시간대 영업 차량 수나 운임 기준마저 제대로 관리·공지하지 않는다. 동시에 본사의 실질적 수입은 택시 기사들과 똑같이 핸들 잡고 운전하는 우버 기사들을 상대로 한 ‘수수료’ 장사에서 나온다. 수수료 장사는 혁신적이긴커녕 자본가들의 전통적인 생존법이 아니던가.
이쯤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혁신 투사를 자임하는 IT 창업자들을 있는 그대로의 자본가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시대와 부문을 불문하고 노동 통제를 강화하고 고용을 유연화하면서 수익을 끌어올리고자 열 일 하는 딱 그 자본가 말이다. 출발점은 젊은 IT 창업자들을 자수성가나 혁신 같은 말에 들러붙은 환상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이겠다.
산업 혁명이 동트던 시기 영국의 ‘러다이트’들은 작업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그 유명한 기계 파괴 행동을 조직했다. 2백 년이 지난 지금 공유 경제에 대해서도 그에 견줄 반역이 꿈틀대고 있다. 우버 기사들은 파업과 노조 결성을 시도하고 ‘진짜’ 데이터를 나눌 포럼 공간을 창설했다. 주거 문제 활동가들은 에어비앤비가 종용하는 단기 주택 임대에 맞서 제도 강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연구자들은 알고리즘의 허상에 접근하며 우버와 에어비앤비의 자화자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규제 완화를 향한 자본가들의 꿈이 여전한 가운데 그 반대편은 노동 조건, 공공성, 투명성을 따지며 제법 전통적인 방식으로 결집하고 있는 셈이다. 이른바 자본가들의 손에서 혁신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전선이다. 이 전선을 이해하고 우리의 싸움을 만들 수 있게 될 때 한국의 ‘수저 계급론’도 신흥 자본가들을 불러내는 굿판에 이용되지 않고 보다 심층적인 불평등 논쟁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워커스 6호 2016.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