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조선일보>가 사활을 걸고 싸운다. 박근혜정부는 <조선일보>를 ‘부패 기득권’이라고 몰아붙였고 일련의 폭로를 통해 일단 1라운드 승점을 땄다. <조선일보>의 송희영 전 주필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넓은 의미의 진보좌파 세력 대부분은 이 싸움을 보면서 은근히 즐거워하는 듯하다. 어느 쪽이 이기든 무협지에서 말하는 ‘양패구상’이 불가피 해 보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안티조선 운동’에도 건재했던 <조선일보>가 ‘부패 기득권’이라는 딱지 자체에 대해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쩔쩔매고 있기 때문이다. 또, 반면에, 친박으로는 절대로 다음 대선에 이길 수 없다는 <조선일보>의 완강한 입장, 그리고 우병우의 의혹이야말로 ‘부패 기득권’이 표본이라는 엄연한 사실 등은 박근혜 정권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무섭다. 이렇듯 보수 세력이 갈라져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두렵다. ‘양패구상’이라는 결과를 박근혜정권이나 <조선일보>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 일단 이런 식으로 싸우지 않으면, 내년 대선에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보좌파 세력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저 이 싸움을 보고만 있다.
이런 식이라면, 친박이든 반박이든 간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보수 세력이 재집권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조선일보> 기자와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 사이에 오간 SNS 내용의 유출과 관련하여, 이 내용이 ‘불법 도청’되었을 수 있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에 주목해야 한다. <조선일보> 기자와 특별감찰관의 대화 내용이 도청이나 해킹되었다면, 나머지 ‘개·돼지’의 대화 내용도 언제든지 도청이나 해킹되고 있거나 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박근혜와 <조선일보>의 싸움에서, 아무리 <조선일보>가 싫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확인해 두어야 할 점은 <조선일보>가 어떤 사회 세력을 정치적으로 대변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일단, 현재까지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은 소위 ‘비박’이다. <조선일보>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인터넷 극우 사이트들에 의하면, <조선일보>는 김무성이나 유승민 등과 같은 ‘비박’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극우 사이트들은 <조선일보> 말고도 <중앙일보>를 비난하고 있다.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는 “핵 동결과 평화협정의 교환이 답이다” “사드를 포기하자” 등과 같은 제목의 칼럼을 써왔는데 바로 이런 전향적인 대북 자세가 인터넷 극우 사이트에서 비난받고 있다.
김무성, 유승민으로부터 김영희를 아우르는 딱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위 ‘합리적 보수’다. 최근 수년간 ‘합리적 보수’는 다르게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 ‘부드러운 보수’ ‘유연한 보수’ ‘개혁적 보수’ 등과 같은 이름으로도 유포됐다. 한국 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란 실제로는 ‘동그란 네모’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합리적 보수’라는 게 일정하게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세 흐름에 따라, ‘합리적 보수’는 김무성, 유승민, 원희룡, 남경필 등은 물론이고 안철수, 김성식, 그리고 김종인, 손학규, 문재인 등을 다 포괄하거나 포괄해낼 수 있다. 지금, 유승민은 양극화와 불평등을 거론하면서 소위 ‘사회적 경제’를 말하고 있고, 김종인은 실체가 없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경제 민주화’ 타령을 계속 늘어놓고 있다.
한국 사회의 소유관계 및 생산관계 등으로 보아, ‘합리적 보수’가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로서 ‘합리적 보수’가 정치적으로 먹힐 수 있다는 것을 <조선일보>는 지난 총선 결과를 통해서 읽어낸 것이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가 읽어낸 바는, 박근혜와 같은 방식으로는 한국 사회의 미래가 불투명할뿐더러, 한국 사회의 유권자들 다수가 그 방식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정 문제에서 <조선일보>가 박근혜를 ‘무능 기득권’으로 계속 물어뜯고 있는 것이나 대북 문제에서 <중앙일보>가 진취적으로 나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독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박근혜와 <조선일보>의 싸움이 당장 박근혜의 승리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정세, 특히 진보좌파의 무기력한 상태를 감안한다면, ‘합리적 보수’가 중심이 되는 ‘보수 대연합’이 다음 대선에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바로 그들을 묶어주는 정치 아이템이 바로 개헌이다.
1980년대식으로 물어본다. 그렇다면, 전선을 어디까지 그어야 할 것인가. 당연히, 가능하다면 일단, ‘국민의 당’을 포함해서 그 왼쪽 모두를 끌어당기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게 아니면, 적어도 ‘더민주당’을 포함해서 그 왼쪽 모두를 끌어당기는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실력이 ‘정의당’조차도 왼쪽으로 끌어당길 수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