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후(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다)
얼마 전 중국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종신집권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이번에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가주석 연임제한규정을 없앤 것이죠. 개헌안은 지난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찬성 2,958표, 반대 2표, 기권 3표로 99.8%라는 압도적 찬성률로 통과됐습니다. 3월 17일에는 시진핑 주석을 아예 만장일치로 국가주석에 재선출했죠.
시진핑이 만장일치로 국가주석에 오른 다음날인 3월 18일, 러시아 대선에서는 푸틴 대통령이 압승을 거두며 2024년까지 장기집권을 확정지었습니다. 2000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한 뒤 2008년 메드베데프를 앞세워 잠시 총리로 물러났다가 2012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한 그는 별 일이 없다면 24년간 러시아를 통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시진핑을 ‘시황제’라 부르고, 과거 러시아제국 황제를 칭하던 짜르라는 표현을 빌려 푸틴에게 ‘푸짜르’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시진핑을 모욕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인적사항이 말소되고, 푸틴에게 대들면 바다 건너까지 쫓아와 방사능 홍차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유머 아닌 유머까지 나오죠.
여느 때처럼 평화롭게 TV를 보며 지나가던 어느 날, 옆에 계시던 분이 이 뉴스를 보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게 다 사회주의라서 그래. 쟤네 공산당 독재잖아. 러시아 저기는 쏘련 아녀.”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당장 윗동네에서는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3대 세습이 이뤄졌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특정인을 닮았다고 곰돌이 푸 사진도 못 올리는 세상에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방사능 홍차를 마시거나 특정 개인을 결사옹위하자는 카드섹션에 동원되고 싶은 생각도 없죠. 이건 사회주의자고 뭐고를 떠나서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일 겁니다(그러길 바랍니다). 사회주의는 정말 독재일 수밖에 없는 걸까요? 이번에는 이 문제를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이게 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어감부터 과히 부드럽지는 않죠. 심지어 ‘독재’라고 하니까요. 분명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회주의의 전통적이고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아니, 사회주의자들은 독재를 원하지 않는다면서 독재를 주장한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일단 한 번 살펴봅시다.
대개 ‘독재’는 한 사람이나 소수의 특정집단이 오래도록 혹은 영구히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뜻하죠. 그런데 프롤레타리아는 곧 노동자계급을 가리킵니다.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계급의 독재라는 말인데,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독재를 한다니, 통상적인 의미의 독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곧 공산당 독재를 뜻하는 걸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맑스와 엥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죠. 즉, 누군가 노동자들을 대신해 권력을 휘두르는 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중국, 구쏘련, 북한이 사회주의냐 아니냐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적어도 노동자들이 또 다른 집단으로부터 억압받고 있다면 그걸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겁니다. 대체 그럼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뭘까요? 이에 대한 답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자본가계급의 독재’라고 봅니다. 물론 기업주나 자본소유주 개개인들이 아무 제약 없이 무법천지로 날’다는 건 아닙니다(그리고 또 물론, 가령 불법파견처럼 대법원 판결까지도 가볍게 묵살하고 마음대로 비정규직을 사용하며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는’ 현대차 같은 자본의 행태를 보면 아주 틀린 것만도 아니죠). 지난 100여 년의 투쟁을 통해 보통선거권도 존재하고 자본을 일정 부분 규제하는 법과 제도도 생겼죠. 그러나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철의 법칙은 헌법조차 건드릴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자본의 이윤추구입니다. 생산도, 분배도, 노동자들의 저항도, 그 무엇도 이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이윤을 근본적으로 침해할 수 없는 한에서만 허용됩니다. 즉, 자본가계급의 독재는 자본가 개개인이 박정희처럼 통치한다는 게 아니라(물론, “민주주의는 공장 담벼락 앞에서 멈춘다”는 말처럼 기업주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틀어쥐고 있는 절대적 독재자죠), 이 사회의 운영 자체가 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이 제시한 ‘정치’에 대한 정의인데, 아직까지 꽤 유명한 명제로 남아 있죠. 결국 여기에서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누구의 권위(권력)인가의 문제일 겁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당 독재나 노동자들 개개인이 박정희처럼 되자는 뜻이 아닙니다. 이윤을 위한 생산과 분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과 분배를 추구하자는 것, 이를 위해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권력에 맞서 노동자들의 새로운 권력을 세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인 것이죠.
‘쏘련’이라는 줄임말에 가려진 ‘쏘비에트’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을 겁니다. 어쨌든 사회주의를 내세워 혁명까지 했던 쏘련은 결국 스탈린 독재로 귀결되지 않았나? 우리에게 ‘쏘련=스탈린=숙청’이라는 등식은 아주 익숙하죠. 물론 현실사회주의는 권위주의와 독재로 비판받으며 대부분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원래부터 소수의 독재를 예고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쏘련’이라고 줄여 부르면서 그 이름이 사라진 ‘쏘비에트’만 봐도 알 수 있죠.
쏘비에트(Soviet)는 우리말로 하면 ‘평의회’입니다. 1905년 패배로 끝났던 1차 러시아혁명 때 처음 등장했다가 1917년 혁명이 벌어질 때 혁명의 주역이었던 노동자·농민·병사들의 평의회로 다시 부활하죠.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농민들은 지역에서, 병사들은 병영에서 자신들의 기구인 평의회(쏘비에트)를 만들고 직접 대표를 선출해 지역 단위, 전국 단위 쏘비에트에 파견했습니다.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던 기존 국가기구를 대신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중의 대표들이 모인 쏘비에트가 진정한 권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바로 이 쏘비에트가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이루어졌죠. 당시 레닌이 주창했던 유명한 구호가 바로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였습니다.
물론 혁명 직후 1918년 독일혁명의 실패와 혁명러시아의 고립, 3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혁명의 민주적 기반이었던 쏘비에트는 물리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은 이제 출세의 창구가 된 공산당의 관료화와 더불어 급속히 체제를 관료적 독재로 변질시켰죠. 이 점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에게 분명 답습하지 말아야 할 교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쏘비에트의 존재로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했고, 쏘비에트의 몰락으로 현실사회주의가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회주의는 불합리한 독재가 아니라, 바로 노동자의 권력이기 때문입니다.[워커스 41호]
하지만 공산당이 권력을 잡을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숙청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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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lkorea.org/v3/?p=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