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역사연구자)
지난 2월 래퍼 던말릭이 두 명의 팬을 성추행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의 소속사가 한국 힙합계에서 여성혐오에 비판적 의식을 가진 유일한 회사이며 그 역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활동해 왔기에 충격이 더했다. 익명의 폭로 이후 곧 그는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고 소속사는 즉시 그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모두 합의에 의한 관계였으나 회사의 다그침 때문에 성추행을 인정했다며 입장을 번복했고, 전 소속사도 다시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한국 힙합의 역사에서 이 사건이 어떻게 기억될지는 아직 예상하기 어렵다.
힙합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동성애자를 비하하면서 남성성을 과시하는 음악 장르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여성에 대한 각종 폭력을 묘사하는 가사들이 큰 문제의식 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면서 힙합이 여성혐오적 음악이라는 오래된 통념은 더욱 굳건해졌다. 서부 힙합의 거물이자 노골적인 가사를 뱉는 ‘포주’ 캐릭터로 유명한 래퍼 투쇼트는 2012년 한 온라인 힙합 매거진에 게시된 영상에서 “아버지의 조언”이라는 말로 십대 소년들에게 놀이를 가장해 소녀들의 몸을 만지는 ‘기술’을 알려주어 물의를 빚었다. 2013년 랩 수퍼스타 릭 로스는 약물을 사용한 데이트 강간을 암시하는 가사를 쓴 탓에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항의가 빗발치자 그는 자신의 가사가 강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스포츠 브랜드 리복은 그와의 광고 계약을 해지했고 예정된 공연은 취소되었다.
논란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잘못된 행동을 한 상당수의 힙합 음악인들이 성범죄 혐의로 법정 공방을 벌였다. 투팍은 1993년 한 여성이 그를 포함한 세 명을 강간죄로 고소한 사건에서 일부 유죄가 인정돼 교도소에 가야만 했다.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말에 따르더라도, 일행이던 두 남자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여성을 남겨둔 채 나가 잠들었고 이후 잔혹한 성폭행이 일어났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라이벌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아내였던 가수 페이스 에반스는 그가 출소 후 음악 작업 비용 문제로 자신을 호텔 방으로 부른 뒤 성적 서비스를 요구했다고 훗날 밝혔다. 그가 에반스의 남편을 공격하는 곡을 발표하자 그녀는 성적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투팍이 뛰어난 예술가라는 이유로 이런 행동들을 옹호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는 흑인 여성을 위한 곡을 쓰기도 했지만 여성을 믿지 않거나 성적 대상화하는 가사를 더 많이 썼고, 위 사건으로 교도소에 다녀온 이후로는 특히 더 그랬다.
힙합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아프리카 밤바타의 성범죄 폭로는 힙합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변호해 온 모든 이들의 믿음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그는 1970년대부터 ‘평화, 사랑, 화합, 재미’라는 구호를 앞세운 단체인 줄루 네이션을 이끌며 브롱크스의 흑인 청년들을 갱단 대신 힙합 문화로 인도해 오랫동안 존경받아 온 인물이었다. 2016년 뉴욕의 사회운동가인 한 남성은 자신이
1980년 15세의 나이로 밤바타에게 5회 이상의 성적 학대를 당했으며 다른 줄루 네이션 멤버도 학대에 가담했었다고 실명을 내걸고 폭로했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었고 사건의 공소시효도 지난 상태였다. 밤바타와 줄루 네이션은 즉시 혐의를 부인했으나 곧이어 3명의 남성이 추가 폭로에 나섰다. 모두 1980년 전후 10대 초중반의 나이로 줄루 네이션에 드나들던 청소년이었다. 밤바타가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지목된 시기는 그가 힙합 문화를 창조하고 청소년들을 이끌던 때였다.
이런 사건들은 힙합을 자랑스러워하던 이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약간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사건이 터지고 난 이후의 대처다. 던말릭의 소속사 데이즈얼라이브는 폭로 당사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들을 재빨리 실시했다. 투쇼트는 위 논란이 자신에게 ‘잠을 깨우는 전화’였다고 표현하면서 자신이 오랫동안 해 온 말과 행동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진정성 있게 사과했다. 릭 로스도 거듭 자신의 가사에 대해 사과했고 사건 당시 자신의 대응을 비판했던 탈립 콸리의 앨범에 참여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고자 한다는 가사를 남겼다. 사건 초기 밤바타를 변호하던 줄루 네이션은 추가 폭로가 이어진 후 사과문을 올리고 밤바타와 사건을 은폐하는 데 관련된 구성원들을 퇴출시켰다. 이처럼 잘못된 행동을 책임지려는 태도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힙합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출처: 탈립 콸리의 State of Grace 뮤직비디오 캡처(goo.gl/ZDXm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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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자!”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잘못을 반성하는 것만으로 힙합은 책임을 다한 것일까? 랩으로 여성과 동성애자를 비하할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힙합이 잘못된 옛 관행들을 표현해 왔다면 변화하는 사회 역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에인절 헤이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래퍼 로즈는 힙합이 피해자의 말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가수 헤이즈가 이름을 따오기도 한 로즈는 여성 래퍼로 알려져 있으나 본인은 스스로를 무성(agender)이자 범성애자(pansexual)라고 소개한다. 로즈는 공교롭게도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적 묘사로 악명이 높은 에미넴이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를 털어놓은 곡인 ‘클리닝 아웃 마이 클로짓’을 빌려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의 성폭력 경험을
고백했다. 옛 기억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과정과 두려움, 자기혐오, 증오, 어머니에 대한 원망 같은 감정들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로즈는 상처를 드러내고 멈출 때까지 피를 흘린 후에야 비로소 과거와 결별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로즈는 이 곡을 발표하면서도 주목받지 않기를 원했지만 비슷한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응답했다. 에미넴과 마찬가지로 로즈는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했고,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곡을 통해 로즈는 힙합이 이전까지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표현했고, 힙합이 여전히 자랑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해 주었다.
미국의 흑인 여성 작가 마야 앤절루는 8살 때 어머니의 남자친구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 사건이 알려지고 가해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교도소에서 하루를 머문 뒤 풀려났고 며칠 후 살해되었다. 자신이 오빠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이후 5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는 대신 보고 듣고 읽기에 열중한 그녀의 생각은 이후 소설과 시로 표현되었고, 커먼과 켄드릭 라마 같은 래퍼들은 그것을 다시 말로 옮겼다. 진지하고도 힘찬 가사가 매력적인 사락(Sa-Roc)도 마야 앤절루를 흑인 페미니스트들인 오드리 로드, 벨 훅스와 더불어 영감의 원천으로 꼽았다. 그녀는 한때 아프리카 밤바타에게 헌정하는 곡을 쓰고 줄루 네이션의 메시지를 자랑스레 인용해 온 래퍼이기도 했다. 그녀는 앤절루와 밤바타의 유산을 이어받았고, 그들은 사라졌다. 이제 힙합이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탈립 콸리와 릭 로스는 말한다. “제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자!”[워커스 41호]
* 4월호에서 언급된 곡들
Sa-Roc – I Am Her
Sa-Roc – Forever
Angel Haze – Cleanin’ out my Closet
Talib Kweli (Feat. Rick Ross, Yummy Birmingham) – Heads Up Eyes Open
http://hiphople.com/subtitle/10816377
Talib Kweli (Feat. Abby Dobson) – State Of Grace
http://hiphople.com/subtitle/2289663